[新 명인열전]“비 왐쩌∼ 날래 걷으라… 팝송처럼 제주어 노래가 널리 불렸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80> ‘제주어 가수’ 양정원 씨

문화창작연구소를 운영하는 양정원 대표는 제주어 노래를 통해 제주 특유의 정서, 혼을 이어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문화창작연구소를 운영하는 양정원 대표는 제주어 노래를 통해 제주 특유의 정서, 혼을 이어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비 왐쩌∼ 날래 걷으라/비왐쩌∼ 날래 들이라/우리 어멍 저들암시난/혼저 걷으라/우리 아방은 궨당네집 잔치밧듸 가곡/넉둥배기 놀멍 정신어신 생이여/비 오민 날래걷읍샌 골아동 밧듸 가신디/술 혼잔에 넉둥배기가 조미난 생이우다/비야비야 오지말라 장통밧듸 물 골람저/비야비야 오지말라 영장밧듸 물 골람저.”

24일 오후 7시 제주시 삼양3동 한라마을도서관에서 제주문화창작연구소인 ‘졸바로’ 양정원 대표(49)의 구성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 대표가 직접 작사, 작곡한 ‘비야비야 오지말라’ 제목의 제주어 노래를 부르자 어린이와 이주민들은 언뜻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지만 나이 지긋한 지역 주민들은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표준어로는 ‘비 온다 곡식 걷어라/비 온다 곡식 들여라/우리 어머니 근심 걱정하니/얼른 걷어라/우리 아버지는 친척집 잔치하는데 가고/윷놀이 하면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시네/비 오면 곡식 들여놓으라고 말씀하시고 가셨는데/술 한잔에 윷놀이하다 보니 재미가 있으신 모양이시네/비야비야 오지마라 옴팡진 밭에 물 고인다/비야비야 오지마라 장례식장에 물 고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양 대표 노래 외에도 시낭송, 민요 등 다양한 공연이 이뤄졌다. 제주어인 졸바로는 ‘똑바로, 제대로’라는 뜻으로 시낭송 김동호, 소리꾼 문석범, 샌드 아트 고혁진, 국악인 정애선, 음향엔지니어 양국진, 영상제작 윤석모 등이 참여해 지난해 창립했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 제주어를 소재로 음악, 시, 공연 등을 하고 음반을 제작해 청소년, 이주민, 다문화가정 등에 제주의 소중한 가치를 알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도와주는 제주정신, 문화가 이어지지 못한 채 단절되는 느낌입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공연을 통해 제주의 정서와 소통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 제주어 가수 활동 10년


양 대표는 2007년 자신의 첫 번째 노래집인 ‘삶 그리고 사랑의 노래’를 발매하면서 제주어 가수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주어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주변 반응이 예상외로 뜨거워서 자신감을 얻었다. 홀로 기획, 공연을 하다가 2008년 2집 ‘제주인의 삶을 노래하다’에 수록된 자작곡 ‘삼춘’이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삼춘은 삼촌뻘 친척이나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등을 두루 지칭한다. 가족과 친척을 위해 희생하는 ‘삼춘’에 대한 애틋한 정을 표현했다. 이 노래가 뜨면서 양 대표는 ‘삼춘 가수’로도 불리기 시작했다.

소규모 공연장에서 활동하다 ‘제주 4·3 평화음악회’ 등 굵직한 무대에 서면서 인지도를 넓혔고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지슬’(2013년 개봉)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뒤 배우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에서 ‘용필이 삼춘’ 역으로 출연한 양 대표는 제주어로 찰진 욕 등을 내뱉으며 긴장 속에서도 웃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소화했다. 양 대표는 물 흐르듯,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말하는 제주어 대사가 일품이다. 공중파 드라마 등에 출연할 때는 다른 배우의 제주어 대사를 감수해 주기도 했다.

배우로도 활동 폭을 넓히고 있지만 양 대표에게 삶의 기둥은 노래다. 중산간(해안과 산간사이) 마을인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서 태어난 양 대표는 둘째 형이 치는 기타, 참전에서 얻은 총탄 상처를 안고 살던 아버지가 아픔을 달랜 하모니카 연주 등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다. 제주 노동요를 구성지게 불렀던 외할아버지, 어머니(3년 전 작고)도 양 대표의 노래에 영향을 끼쳤다.

성산수산고를 졸업한 뒤 해병대 568기로 자원입대하면서 그의 노래인생은 시작됐다. 해병대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면서 노래를 배우고 불렀다. 제대하고 나서는 서귀포지역 음악다방 등지에서 언더그라운드 생활을 시작했다. 정규적인 과정에서 음악을 배울 여건이 아니었기에 독학했다. 나이트클럽 등에서 밴드 보컬을 하면서 베이스 기타 등을 어깨너머로 익혔다.

○ 기적 같은 노래 인생


통기타 가수 겸 보컬 생활에 재미가 더해지던 1994년, 교통사고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수산리 고향집에서 지내던 중 동료들과 인근 마을을 다녀오다 승용차가 뒤집어진 것이다. 이 사고로 양 대표는 목뼈가 탈골됐다. 눈만 껌벅일 수 있을 뿐 전신마비였다. 국립중앙의료원에 이송돼 뇌에 지지대를 박아 몸 전체를 고정시켰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귀로는 모든 말이 들리는데 어떤 움직임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서 간호하는 어머니가 너무 가여웠지만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살아나도 휠체어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니 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제주의 한 병원에서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양 대표에게 마지막 소원이 생겼다. ‘죽을 때 죽더라도 노래 한 곡 한번 실컷 불러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목표가 생기자 의욕도 생겼다. 다른 환자의 도움으로 허리를 일으키는 연습을 거듭하다 앉을 수 있는 정도까지 진전했다. 앉을 수 있자 퇴원했다. 입원비를 감당할 집안 형편이 아니었다. ‘앉을 수 있으면, 설 수 있다’는 집념으로 발가락을 움직이고 무릎을 조금씩 세웠다. 걸음이 가능해지자 동네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오그라든 손, 절뚝거리는 발걸음 때문에 ‘귓것(바보)’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걸음이 익숙해지자 오그라든 손으로 기타를 잡는 연습에 매달렸다. 그저 노래 한 곡을 제대로 불러 보고픈 집념뿐이었다. 사고가 난 후 4년이 지나서야 남들에게 제대로 노래를 들려줄 수 있었다. 국립중앙의료원 담당 의사는 “기적이다”고 감탄했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경기 양평지역 등지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2001년부터는 매년 ‘불우장애아동 돕기 사랑의 콘서트’를 열었다. 같은 해 열린 제6회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대상 대중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양 대표는 “우리가 팝송 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좋아하듯이 제주어 노래가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정서와 감성을 담아낸다면 대중성을 얻을 수 있다”며 “경제적인 여건 등으로 2013년을 끝으로 중단한 장애우를 위한 사랑의 콘서트를 올해 다시 재개해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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