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 City]숲길로 뜬 경의선 철길… 무명화가 떠난 욕망의 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8> 영화 ‘당신 자신과…’ 속 연남동

▲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중에서 주인공 상원과 민정이 경의선숲길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
▲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중에서 주인공 상원과 민정이 경의선숲길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특정 지역을 무대로 삼는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여우주연상) 수상작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공간은 강원 강릉시 해변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경기 수원시 화성 행궁, ‘북촌방향’은 서울 종로구 북촌이 배경이다. 별다른 세트 없이 실제 그곳에 존재하는 시설이나 가게가 영화에 그대로 등장한다. 이런 ‘날것’의 장소는 관객이 등장인물의 대사에 숨겨진 서투른 욕망이나 보잘것없는 본성에 몰입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지난해 개봉한 홍 감독의 작품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의 무대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걸어서 10분 정도면 어디든 오갈 수 있는 연남동이라는 공간은 우연한 목격과 마주침을 이야기 전개의 핵심 요소로 삼은 이 영화에 안성맞춤이다.

무명 화가인 주인공 영수(김주혁 분)는 홍익대 앞에서 떠밀려 연남동까지 온 듯하다. 영수와 재영(권해효 분), 상원(유준상 분)은 경의선숲길공원 연남동 구간과 ‘카페 곤’을 비롯한 근처 가게들에서 결코 ‘당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민정(이유영 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실의 연남동은 같은 사람을 우연히, 그것도 여러 번 마주치거나 목격하기에는 굉장히 번화한 ‘핫플레이스’다. 이전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경의선 철길과 그 아래 늘어선 순댓국집, 주로 화교가 주인이고 손님이던 중국음식점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리틀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불렸던 동네다. 그러던 곳이 주요 상권으로 부상한 건 2015년 경의선숲길공원이 생기면서부터다.
▲ 토요일인 24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 공원 연남동 구간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토요일인 24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 공원 연남동 구간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경의선숲길공원은 효창역에서 가좌역까지 6.3km 길이의 경의선 용산선을 지하화하면서 생긴 유휴(遊休) 철도 터에 만들어졌다. 2005년 철도가 땅 밑으로 들어간 뒤에도 6년 동안 방치됐다. 2011년 마포구 대흥동 구간을 시작으로 지난해 5월까지 전 구간에 공원이 들어섰다.

최현실 서울시 공원조성과장은 “폐선(閉線) 이후 방치되는 동안 주변이 슬럼화하기도 했지만 주민 산책로이자 아이들 놀이터, 학생들 통학로 등 일상의 추억이 담긴 아날로그적 감성이 배어 있는 공간이 됐다”며 “이런 정체성이 공원을 설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공원 곳곳에 남은 철로는 자연스레 남은 흔적이 아니라 이런 역사성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만들었다.

공원 중에서도 1.3km의 연남동 구간이 가장 붐빈다. 홍익대 상권의 젠트리피케이션(임차료가 올라 기존 주민과 상인이 떠나는 현상)으로 연남동이 부상하던 때와 공원 개원이 맞물리면서 명소가 됐다. 연남동 중심을 가로지르는 이 구간은 뉴욕 센트럴파크에 빗댄 ‘연트럴파크’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다른 구간에선 볼 수 없는 물길도 있다. 경의선 지하화 공사를 하며 땅을 파낼 때 나온 용출수를 끌어올려 흐르도록 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상원이 이 물길에 발을 담그고 있는 민정과 조우한다.

다만 워낙 동네가 뜨다 보니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심각한 장소로 꼽힌다. 영화에서처럼 ‘홍익대에서 밀려온 무명 화가’가 작업실 겸 살 공간을 마련하기에는 너무 비싼 곳이 돼 버렸다. 최근에는 부지 소유주인 한국철도시설공단과 공원 조성비 457억 원을 들인 대신 무상 임차한 서울시 간에 사용료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다. 서로 이곳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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