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파워기업]OEM방식으로 신발시장 주름잡는 ‘신발 名家’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일 03시 00분


<58> 신발업체 우영제화

부산 금정구 금사공단 우영제화 작업장에서 근로자들이 신발 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우영제화 제공
부산 금정구 금사공단 우영제화 작업장에서 근로자들이 신발 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우영제화 제공
‘기본에 충실, 분야에 최고, 나보다 우리.’

부산 금정구 금사공단 ㈜우영제화의 경영 방침이다. 책상과 장식장, 바닥 곳곳에 신발 견본품과 관련 잡지, 각종 상패가 가득한 우영제화 윤용도 대표(54)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사풍을 반영하듯 화합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저와 형님이 회사를 만들고 경영책임자인 건 맞지만 회사가 지금까지 성장하고 굴러가는 것은 전적으로 직원들의 공입니다.”

윤 대표가 종업원을 우대하고 이윤을 나누는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부산시 ‘2017 부산중소기업인대상’에 뽑힌 우영제화는 1989년 1월 윤 대표의 친형인 윤원식 고문(60)이 설립한 신발 완제품 업체다. 창립 당시 금사공단은 부산을 대표하는 공단일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쇠락했다가 최근 첨단산업단지, 제2센텀지구 개발 계획이 잇따라 인근에서 추진되면서 활력을 되찾고 있다.

윤 고문은 1995년 뜻하지 않게 경추(목뼈)에 이상이 생겨 큰 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해졌다. 신발업계의 마당발로 소문난 그의 노력과 직원들의 역량으로 회사가 잘나가던 때였다. 윤 고문이 휠체어에 의지한 채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는 대구교대를 나와 경북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윤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윤 대표는 8년간의 교직생활을 접고 1996년부터 경영 수업을 받은 뒤 1999년 대표이사가 됐다.

우영제화의 대표 브랜드는 ‘세계로’다.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가 세계 신발시장을 주름잡겠다는 윤 고문의 의지가 담겼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신발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자체 브랜드 생산 대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전환했다. 신발업계의 흐름이었다.

현재 우영제화의 OEM 주요 브랜드는 데상트, 르꼬끄, 슈콤마보니다. 운동화를 비롯해 등산화, 캐주얼화, 샌들, 특수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만들어 낸다.

연간 매출은 170억 원. 직원 80명이 연간 생산하는 신발은 60만 켤레로 1인당 하루 20켤레꼴이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 속에 창립멤버 5명을 비롯해 30명이 20년 이상 장기근속 숙련공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원가 절감을 위해 갑피(甲皮)는 중국에서 임가공해 들여온다. 나머지 아웃솔(outsole·구두창), 중창, 밑창 같은 소재는 거래업체 80곳에서 납품한다. 빈틈없는 공정과 품질관리,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위기도 있었다. 1998년부터 주 거래처이던 리복 브랜드가 2007년 아디다스 계열로 넘어가면서 주문이 끊겨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업계에 쌓은 신뢰와 품질 덕분에 1년 뒤 아디다스 측이 파트너 제안을 해 고비를 넘겼다. ‘기본에 충실하고, 신발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고, 직원과 거래처에는 깍듯이 하라’는 창립자의 소신이 작용한 것이다.

윤 대표는 이윤을 나누는 사회공헌활동에 더 열심이다. 금정구 중소기업발전협의회 회장, 네오필하모니오케스트라 후원회장, 기장·해운대장애인부모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와 근로청소년장학생 선발에도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1991년 사원으로 입사한 반성초 전무(62)는 “부침이 심한 신발업계에서 우영제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구성원이 일심동체였기 때문이었다”며 “좋은 경영으로 수출시장이 활짝 열리길 바란다”고 했다.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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