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장모 씨(52)는 자신의 집에 경찰관이 찾아오자 현관문을 열어주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 김성용 경위는 개의치 않고 수갑을 채웠다. 체포된 장 씨가 경찰서로 잡혀가는 길,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피해자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늘이 맑다가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겠어요.”
김 경위의 비난에 장 씨는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고 그러던데 뭐…”라며 딴소리를 했다. 장 씨는 이날이 숨죽이며 들키지 않고 살아온 15년의 마지막이 될 줄 모르는 듯했다.
○ 결정적 물증 ‘쪽지문’
2002년 12월 14일 서울 구로구의 한 호프집에서 주인 A 씨(당시 50세·여)가 둔기로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됐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 감식반 요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폐쇄회로(CC)TV가 없었고 가게 바닥에 나뒹구는 맥주병 3개는 지문 하나 없이 말끔했다. 수건으로 병을 닦아낸 흔적이 역력했다. 이때 주변을 둘러보던 한 감식요원이 깨진 맥주병 조각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니 완전하지 않은 지문, 즉 ‘쪽지문’이 나왔다. 엄지손가락의 3분의 1쯤 되는 크기였다.
현장에서 확보한 물증이었지만 쪽지문만 가지고는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 당시엔 온전한 지문 하나를 감식하는 데도 5일 넘게 걸렸다. 경찰은 피해자 명의의 신용카드가 사용된 가게를 탐문하고 몽타주를 만들어 공개 수배를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7년 12월 13일. 영구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해 1월 경찰의 재수사 대상이 됐다. 2015년 7월 개정된 형사소송법, 일명 ‘태완이법’ 덕분에 2000년 8월 이후 발생한 모든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되면서 먼지로 뒤덮였던 영구미제 사건들이 햇빛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태완이법’은 1999년 5월 대구에서 황산 테러로 숨진 김태완 군(당시 6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15년 만에 풀린 응어리
경찰에 14년 전 확보한 쪽지문은 금쪽같은 단서가 됐다. 2012년 도입된 지문자동감식식별시스템(AFIS)으로 쪽지문에서 추출한 특징과 주민등록 지문정보에 입력된 지문들을 비교해 용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 지문 감식 결과 일치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장 씨였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됐던 키높이 구두로 추정되는 뒷굽이 둥근 족적(발바닥 지문)도 중요한 단서가 됐다. 경찰은 키가 165cm 정도인 장 씨의 집에서 사건 현장의 족적과 유사한 자국이 찍히는 키높이 구두를 두 켤레 발견했다. 또 장 씨의 얼굴은 사건 발생 당시 수사팀이 만들어 배포했던 수배전단 속 몽타주와 흡사했다.
지난달 29일 경찰이 키높이 구두 증거를 들이밀며 “그 정도 버텼으면 됐다”고 설득하자 장 씨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제가 그랬습니다.”
살인사건 피해자와 유족의 15년 묵은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범행을 자백한 장 씨는 “사건 직후 동네에 붙은 수배전단을 보고 내 모습과 똑같아 너무 놀랐다”고 경찰에 털어놨다.
경찰은 전국 17개 지방경찰청에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을 설치해 영구미제 273건을 재수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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