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의 넓이 4.95m² 경비실에서는 선풍기 두 대가 돌고 있었다. 벽걸이 선풍기 한 대로는 더위를 쫓기에 턱도 없어 경비원 A 씨가 한 대를 집에서 가져다 놓았다. 이날 서울 낮 최고기온은 섭씨 32.8도를 기록했다. 전날에는 섭씨 35.4도로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책상과 작은 소파가 절반을 차지한 비좁은 경비실에서 선풍기 두 대는 그리 시원하지만은 않은 바람을 뿜어댔다. 땀에 절어 군청색으로 변한 파란색 경비복 상의를 입은 A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비원들의 노고에 주민들이 화답했다. 몇몇 주민이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관리사무실에 요청했다. 2, 3년 전부터 여름만 되면 나왔다가 묻힌 주장이었지만 주민 대표들은 “이번만큼은…”이라고 생각했다. 25일부터 12개동 2100가구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경비실 에어컨 설치 찬반투표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아파트 밖 사람들이 ‘100원짜리 투표’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에어컨 12대 구입비 480만 원은 아파트 단지에서 재활용품 판매대금이나 전단 수입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다만 에어컨 공동전기료는 주민 부담이다. 예상 전기료는 여름철 매달 20만 원으로 가구당 평균 100원꼴이다. 아파트 게시판의 투표 안내문에는 에어컨 설치 시 단점의 하나로 ‘월 세대당 100원(공동전기료) 증가 예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어컨 설치에 찬성하는 주민들은 굳이 투표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반응이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억지로 하는 일인 양 변질될까 우려스럽다는 얘기다. 한 주민은 “경비원을 배려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 엉뚱하게도 한 달에 100원을 더 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비쳐 민망하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여름이라고 해도 1년에 서너 달이다. 10년 넘게 (100원씩) 내봤자 올해 최저시급(6470원)에도 못 미친다”며 “주민만 우스워졌다”고 했다.
주민 대표들은 아파트 입주민의 여건과 주변 단지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한 ‘또 다른 배려’라고 설명했다. ‘당연한’ 사안이라도 민주적 절차는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 주민 대표는 “여기는 임대아파트로 2100가구 중 30% 남짓은 에어컨조차 없다”며 “‘우리도 없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를 주민 의견까지 수렴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30년 된 아파트라 설계할 때부터 예상 사용전력을 낮게 잡아 여름 겨울같이 전기 소비가 늘 때는 자주 정전이 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 대표도 “주변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처지라 우리가 그냥 에어컨을 달면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주민의 뜻이라는 명분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찬반투표 결과는 29일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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