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주의 날飛]‘노루’처럼 깡충깡충?…이름값 하는 태풍?!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15시 03분


7월 19일 일본 도쿄 서남서쪽 태평양 한 복판에서 발생한 제5호 태풍 ‘노루’ 경로가 불안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게 뱅뱅 돌더니 1일 오전에는 남해 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1일 새벽 한 때 중심기압이 935헥토파스칼, 최대풍속 초속 49m까지 부는 매우 강한 태풍으로 발전해 있는 상태라 주의가 필요하다. 얼마 전까지 일본으로 향할 것 같던 태풍이어서 조금 더 주의해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제5호 태풍 노루의 이동 경로와 예상 진로. 자료 : 기상청
제5호 태풍 노루의 이동 경로와 예상 진로. 자료 : 기상청


일반적으로 태풍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 꾸준히 북쪽으로 올라간다. 동, 서만 바뀌는데, 처음에는 북서쪽으로 움직이다가 북위 30도 정도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중에는 북동쪽으로 올라간다. 태풍의 진로를 선으로 그리면 대체로 포물선이 된다. 북위 30도를 기준으로 남쪽에서는 동풍이, 북쪽에서는 서풍이 부는 까닭이다. (풍향은 불어오는 쪽이 기준이다.)

태풍 진로의 ‘전형’을 보여주는 지난해 제16호 태풍 ‘말라카스’. 자료 : 기상청
태풍 진로의 ‘전형’을 보여주는 지난해 제16호 태풍 ‘말라카스’. 자료 : 기상청


하지만 태풍 노루는 태어나자마자 서쪽으로 움직이더니 U턴을 하며 다시 동쪽으로 움직였다가 또 반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일본 도쿄 정남쪽까지 내려갔다. 여기서 방향을 또 틀어서 이제 다시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을 향해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제멋대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노루처럼 경로도 제멋대로다.

비슷한 사례는 작년에도 있었다. 지난해 10번째로 발생한 태풍 ‘라이언록’의 경로도 독특하기로는 ‘노루’에지지 않는다. 처음엔 남서쪽으로 가면서 일본에서 멀어지더니 그러다 S자를 그린 후 다시 U턴을 해서 일본 도쿄 쪽으로 날아갔고, 결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까지만 태풍 3개가 본토를 덮쳤던 일본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제10호 태풍 라이언록의 이동 경로. 일본은 이 태풍을 포함해 작년 한 해만 8번이나 태풍이 지나갔다. 자료 : 기상청
지난해 제10호 태풍 라이언록의 이동 경로. 일본은 이 태풍을 포함해 작년 한 해만 8번이나 태풍이 지나갔다. 자료 : 기상청


‘라이언록’은 홍콩에 있는 바위산 이름이다. 1990년대까지 항공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았다. 1998년까지 홍콩 관문 역할을 한 ‘카이탁 국제공항’은 해변가에 있었는데, 활주로 연장선상에 이 라이언록(Lion Rock)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홍콩에 착륙하는 비행기는 직선으로 내리지 못했다.

결국 비행기들은 공항을 오른 쪽에 두고 라이언록을 바라보며 홍콩 도심을 가로질러 접근하다가 착륙 직전 급하게 방향을 틀어 활주로에 내려앉아야 했다. 과거 홍콩 홍보 영상에 지붕 위로 손에 잡힐 것처럼 낮게 나는 비행기가 자주 등장했던 이유도 바로 이 라이언록 때문이었다. 비행기 경로를 비틀어놓은 라이언록이라는 이름이 태풍에 붙으면서 태풍 경로도 비틀어져 버렸다.

홍콩에 있는 라이언록과 옛 카이탁 국제공항의 위치. 활주로 연장선에 라이언록이 위치하고 있다. 자료 : 구글어스
홍콩에 있는 라이언록과 옛 카이탁 국제공항의 위치. 활주로 연장선에 라이언록이 위치하고 있다. 자료 : 구글어스

※1990년대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급선회하며 착륙하는 비행기들. 자료 : 유튜브 영상
홍콩의 옛 대표공항이었던 카이탁 국제공항의 착륙 경로. 자료 : flynwill.com·젭슨
홍콩의 옛 대표공항이었던 카이탁 국제공항의 착륙 경로. 자료 : flynwill.com·젭슨


이렇게 태풍이 진로를 제멋대로 비틀면서 이동하면 태풍이 살아있는 기간도 길어진다. 한여름 따뜻하게 덥혀진 바다에서 증발하는 수증기가 태풍의 힘을 키우는 먹이다. 바다 위에서 태풍이 오래 살아남으면 힘도 세 진다는 뜻이다. 올해 들어 가장 최근 발생한 제10호 태풍 ‘하이탕’이 만 이틀 만에 생을 달리한 반면 ‘노루’는 지금까지 12일을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약 3~4일 정도는 더 위용을 떨칠 기세다.

태풍의 눈이 뚜렷하게 보이는 제5호 태풍 ‘노루’의 위성 영상. 자료 : 기상청
태풍의 눈이 뚜렷하게 보이는 제5호 태풍 ‘노루’의 위성 영상. 자료 : 기상청


그렇다고 태풍의 이름과 특성에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다. 태풍 이름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태풍위원회에 속한 14개 회원국에서 제출한 이름을 돌려가며 쓴다. 우리나라에서 노루, 개미, 나리 등 10개를 제출했다. 북한에서도 기러기, 종다리, 민들레 등 10개를 제출하면서 한국어 이름 비중이 늘어났다.

‘라이언록’ 이야기를 하면서 비행기를 잠깐 언급했는데, 태풍과 비행기 사이에 닮은 점이 하나 있다. 막대한 피해를 주면 이름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2003년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매미’는 이름이 사라지고 ‘무지개’로 대체됐다. 2005년 ‘나비’ 역시 일본에 큰 피해를 준 후 ‘독수리’로 바뀌었다. 비행기의 경우 인명피해가 큰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비행기의 편명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관례가 있다. 1997년 괌 안토니오 B.원 팻 국제공항에 착륙하려다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KE801편도,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안타까운 인명 피해를 냈던 OZ214편도 사고 이후 모두 편명이 바뀌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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