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암살에 실패한 염석진(이정재)이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의 집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다. 사랑채에서는 다과를 즐기던 총독부 일본인 관료들에게 강인국이 사업 얘기를 꺼내려 한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카메라는 이내 방향을 바꿔 넓은 정원과 현대적 양식의 저택을 담아낸다. 근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한껏 보여준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윤옥(전지현)의 친부이자 악랄한 친일파 강인국의 저택으로 나오는 집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백인제 가옥’이다. 친일파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이 1913년 지었다.
백인제 가옥에서는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460m²의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정원이 눈길을 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한 전통 한옥과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돼 신발을 신고 나가지 않아도 오갈 수 있다. 안채 일부는 2층으로 돼 있는데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당시 일제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최고급 자재로 꼽히던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해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조선총독들과 권세가, 미국 석유왕 록펠러 2세 등이 연회를 즐겼다.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언론인 최선익의 소유를 거쳐 1944년 백인제 선생이 거액을 들여 사들였다. 도쿄(東京)대 의대를 졸업한 백 선생은 당대 의료계 1인자로 꼽혔다. 그는 이곳에서 서재필 박사, 춘원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정치에 뜻을 품기도 했다. 광복 후 첫 총선인 1948년 5·10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중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집에는 그가 당대 주요 인사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집에서 백 선생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진 뒤 납북됐다. 당시 북한군이 의료분야 최고 전문가를 구하기 위해 끌고 갔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의 생사를 알 수 없던 백 선생의 부인 최경진 여사와 가족은 집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최 여사는 60년가량 안주인으로서 백인제 가옥을 지켰다. 1988년 아들 낙훤 씨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서울시는 2009년 북촌문화센터로 쓰겠다며 141억 원을 주고 매입했다. 1977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박원순 시장이 보궐선거로 당선된 이듬해인 2012년 서울시는 가옥을 시장 공관으로 낙점하고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화재 훼손 우려와 친일파가 지었다는 점 등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시는 국내 의료계에 기여가 큰 백 선생이 인수했고 한옥 시장 공관의 상징성이 크다며 뜻을 고집했지만 논란이 커지자 계획을 백지화했다. 이후 보수와 정비를 거쳐 2015년 11월부터 일반에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북촌의 한옥 가운데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전시한 건물 내부까지 공개하는 집은 이곳이 유일하다.
가옥은 26일까지 매주 금, 토요일 오후 8시까지 연장 개방한다. 최근 2대 소유주 최선익이 생전에 사용한 가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가옥을 둘러보려면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yeyak.seoul.go.kr)에서 사전 예약을 하면 된다. 무료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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