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가 1900년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공포한 칙령 41호 2조다. 당시 칙령은 독도가 ‘석도’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국령임을 알렸다. 석도가 독도임은 지난해 조선어대사전이 발견되며 문헌으로 확인됐다. 당시 독도에 살고 있던 전라도 사람들이 방언으로 이르는 독도의 이름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시마네현이 1905년 독도를 불법 편입한 뒤 일본 학자들은 석도가 독도와 같은 섬이라는 점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당시 독도에 이주한 사람들은 전라도 고흥사람이며 그들은 돌로 된 섬을 독섬, 독도, 혹은 한자식으로 석도라 불렀다. 그 증거가 지금도 고흥에 남아 있다.
20일 전남 고흥군과 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에 따르면 고흥에는 무인도 206개가 있다. 이 가운데 독섬이라는 지명을 가진 섬 1개, 독도(獨島)라는 지명의 섬이 1개, 석도(石島)라는 지명의 섬이 2개가 있다. 고흥군 과역면 연등리와 신곡리 돌섬 2개는 지적도에 등재되면서 석도라는 지명이 붙었고 금산면 오천리 돌섬은 독도로 명명됐다. 도화면 덕중리 돌섬은 면적이 작아 지적도에서는 빠졌지만 돌을 독으로 표현하는 남쪽 지방 방언을 그대로 써 독섬으로 불렸다.
독도의 ‘전라도 방언 유래설’은 구한말 울릉도 인구 가운데 고흥 지역 주민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고종 때인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이 왕명으로 울릉도를 살펴보고 작성한 ‘울릉도검찰일기’에는 주민 140명 가운데 전남 고흥 사람이 94명, 전남 순천 낙안사람이 21명 등으로 전라도 사람이 115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나머지는 강원도 14명, 경상도 10명, 경기 파주 1명이었다. 이들 개척민은 당시 ‘산림훼손 금지령’으로 육지에서 선박을 건조하지 못하게 되자 나무가 울창한 울릉도로 옮겨가 선박을 건조하고 어로활동 등을 했다.
고흥군과 우리문화가꾸기회는 22일 국회 도서관에서 ‘독섬, 석도(石島), 독도(獨島)―고흥의 증언’이라는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문헌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독도가 우리 땅임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다.
심포지엄에서 우리문화가꾸기회 이사인 이동식 전 KBS정책기획본부장이 일본 최고의 음운학자인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돌’이란 단어를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독’으로 발음했다고 조사한 내용을 발표한다. 이종훈 춘천교대 교수는 1938년 발행된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초판본)이 얼마나 중요한 자료인지를 설명한다.
피터 바돌로뮤 씨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독도가 석도와 동일한 명칭임을 분석해 발표한다.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는 고흥에 지금도 ‘독섬’ ‘독도’ ‘석도’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지, 고흥 사람들의 해양문화가 어떻게 독도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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