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입니다. 마광수 교수(1951~2017)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태 윤동주 시인(1917~45)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지 모릅니다. 기형도 시인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도 마 교수 덕분입니다.
이제 윤 시인은 ‘국민 시인’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 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도 윤 시인은 이 정도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에서 1990년 광복절이 되어서야 윤 시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는 게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윤 시인이 명성을 얻게 된 건 마 교수가 1983년 쓴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덕분이었죠. 마 교수는 이 논문에서 국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윤 시인의 모든 시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시에 ‘부끄러움’이라는 정서에 깔려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문제집에서 윤 시인 시를 해설한 내용은 거의 이 논문에서 따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 교수는 이 논문에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마 교수는 또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 교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산문 작가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청록파 시인 박두진(1916~98)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198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된 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예심 심사위원을 지냈습니다. 응모작 3000편 중 15편 정도를 골라 본심에 올리는 게 그의 임무. 그해(1985년) 최종 당선작으로 뽑힌 게 바로 기 시인이 쓴 ‘안개’였습니다.
그러나 마 교수는 이 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심을 보던 중 어떤 응모작이 전혀 마음에 안 들어서 낙선작으로 던져 버리고 난 직후에 무슨 텔레파시 같은 육감이 느껴져서 던져버린 작품을 다시 집어 들고 보니 작자가 (내가 지도 교수로 있던 연세문학회 회원) 기형도 군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인맥으로 그의 시를 특별히 뽑은 것이다. 사실 공정한 심사위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고 말했습니다.
마 교수는 끝까지 기 시인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009년 여성동아를 통해 가수 조영남 씨와 대담을 하면서 “기형도는 난해해. ‘물속의 사막’,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가 있는 시 제목이 ‘빈집’이야. 무슨 연관이 있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고나 기형도를 좋아하는 걸까. 어려운 글은 무조건 못쓴 글”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구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52·우석대 교수)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도 마 교수가 예심 심사위원이었죠.
마 교수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한양대 강사 시절이던 19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그해 4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세상을 그르치는 신념의 공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마 교수는 이 글에서 ”단발령을 내렸을 때 땅을 치며 통곡하던 유생(儒生)들의 애절한 신념, 그 편협한 선비주의적 신념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미덕으로 남아 있다“면서 ”이 세상의 악과 불행은 ’이상의 결핍‘ 때문에 비롯되지 않는다. 되레 모든 악과 불행은 오로지 ’잘못된 이상‘,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던 마 교수가 일생을 떠받친 신념은 아마도 ”위선적인 성(性)문화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여전히 ’선비주의적 신념‘이 지배하던 시대는 쉽게 마 교수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를 쓴 죄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는 최근까지도 ”사회적으로 학살당했다“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 교수는 우리에게 윤동주와 기형도를 남긴 채 자기 시집 제목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처럼 떠났습니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분(粉)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현실적으로/진짜 현실적으로“ - 마 교수 시 ’나는 야한 여자다 좋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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