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의 67주년 기념일이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1880~1964)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승기를 잡은 미드웨이 해전 등과 더불어 세계 전쟁사에 남을 기념비적 작전으로 꼽힌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곧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이 작전의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유엔군과 국군은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을 쓰며 인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 중 ‘크롬 광석’을 암호명으로 골랐다.
당시 미 국방부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의 특성 상 대규모 군대의 인천 상륙이 불가능하다며 전북 군산 상륙을 강력히 권고했다. 맥아더의 정적(政敵)이었던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도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원수 계급과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인천을 밀어붙였다. 북한군의 보급 경로를 끊고 적의 후방을 완전 단절하려면 한반도 남부인 군산보다는 인천이 최적지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천 상륙 성공 후 국군과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소설가 복거일은 2010년 동아일보에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를 연재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전쟁사에 빛나는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아더는 승리를 너무 과신했다. 평양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해 전쟁을 끝내려했으나 1950년 10월 말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과 만난다. 중공군을 얕잡아본 그의 판단 실책으로 연합군은 중국군에 쫓겨 38선 이남으로 후퇴했다.
맥아더는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고 자연인이 됐다. 그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고 국군도 38선 이북 영토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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