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노모 매일 뵙는게 소원이라더니… 예비신부 놔둔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8일 03시 00분


강릉 석란정 화재로 소방관 2명 참변

17일 오전 3시 51분 강원 강릉소방서로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불이 난 곳은 강릉시 강문동 석란정(石蘭亭). 전날 오후 9시 45분경 발생했다가 소방대원에 의해 꺼진 불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약 400m 떨어진 경포119안전센터(경포센터) 소방관들이 긴급 출동했다. 석란정은 1956년 지어진 목조 건축물이다.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오랜 기간 경포를 지킨 건물인 데다 다시 살아난 불이라 소방관들은 진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 덕분에 8분 만에 불길을 잡았다. 소방관들은 30분 가까이 현장을 지켰다. 혹시 남았을 불씨 걱정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 4시 29분경 건물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영욱 소방위(59)와 이호현 소방사(27)가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956년 지어진 석란정의 화재 전 모습.
1956년 지어진 석란정의 화재 전 모습.
얼마 뒤 굉음과 함께 낡은 지붕과 벽체가 무너졌다. 구조에 나선 동료들이 10여 분 만에 두 사람을 찾아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 석란정은 목조기와 건물이다. 높이 10m, 면적 40m² 규모. 철거가 예정된 무허가 건물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건물 외벽에 금이 가는 등 이상이 제기됐다. 이런 상태에서 전날 화재로 기둥이 약해지고 물을 많이 머금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소방본부 관계자는 “문화재는 아니나 보존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진화하려다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소방관이 발견된 지점은 출입구 근처였다. 붕괴 조짐이 보여 빠져나오려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화재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건물 내부에는 전기시설이 없다. 실화 등 외부 요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근처에 폐쇄회로(CC)TV는 없다. 석란정은 높이 3m가량의 펜스에 둘러싸여 있다. 다만 10m가량 떨어진 대형 호텔 공사 현장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다. 현장에서는 시너통 1개가 발견됐다. 건물 관리인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직접적인 화재 원인으로 보기 어렵지만 불길을 확산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화재에 취약한 석란정이 두 차례 발화와 진화를 통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며 “화재 원인을 다각도로 조사 중이다”고 밝혔다.

이 소방사는 소방관을 준비하며 주변에 “나중에 결혼한 뒤 태어날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올해 1월 소방관의 꿈을 이룬 뒤 그는 “남을 도우면서도 이만큼 자랑스러운 직업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소방관이라는 일의 자부심이 컸다.

이 소방사 빈소에는 상복을 입은 여자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내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계절별로 여러 사진을 찍어 놓기로 했다. 그러나 올여름 이 소방사가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됐다.

이 소방위는 ‘잉꼬부부’로 소문났다. 재치가 넘쳐 늘 가족을 즐겁게 해주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싫은 소리, 화 한 번 내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2000년대 초 어머니(91)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 소방위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지금도 쉬는 날이면 빠짐없이 요양원을 찾아 노모의 말동무 역할을 했다. 그의 소원은 매일같이 노모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이 소방사는 베테랑 이 소방위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이 소방위 역시 현장에 출동하면 이 소방사를 아들처럼 여기며 가르쳤다. 최상규 경포119안전센터장은 “한 팀을 이뤄 화마와 싸워 온 동료를 잃게 돼 너무 안타깝다”며 “강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던 이 소방위와 팀 막내로 센터 분위기를 밝게 만들던 이 소방사가 순직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소방관에게는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이 추서된다. 영결식은 19일 오전 10시 강릉시청 대강당에서 강원도청장(葬)으로 거행된다. 영결식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강릉=이인모 imlee@donga.com·황성호·최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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