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국회 회의록 어디에도 이보다 ‘섹시한’ 한 줄은 없다. 누구나 한번쯤 위정자들을 향해 내뱉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던 그 말. 어쩌면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1918~72·당시 한국독립당)이 아니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감히 외칠 수 없던 말. 그 말은 바로….
그리고 김 의원은 정말 정일권 국무총리(1917~94),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16~77·한국일보 사주) 등을 향해 똥물을 뿌렸다. 1966년 9월 22일, 나중에 역사가들이 ‘국회 오물투척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 의원은 똥을 양철통에 담은 뒤 마분지로 포장해 이를 들고 이날 오후 12시 45분경 질문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 후 1시 5분경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풀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밀수 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포장지 위에 있던 흰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이어 똥을 뿌렸다.
이 마지막 발언에 김 의원이 똥을 준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밀수 사카린’이다.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은 그해 5월 흔히 설탕 원료로 쓰는 사카린(새커린)을 일본에서 밀수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새커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 자재로 꾸미려다 들통이 난 것.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과 유착 관계였던 군사정권은 밀수품을 압수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통과시키며 조사에 나섰다. 김 의원이 똥을 뿌린 건 대정부 질문 이틀째였다.
김 의원은 사건 다음날 자택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내가 던진 오물은 내각 국무위원 개인에게 던진 게 아니라 헌정을 중단했고 밀수 사건을 비호하고 있는 제3 공화국 정권에 던진 것”이라며 “문제의 오물은 순국선열의 얼이 서린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낸 것”이라고 했다.
충격이 컸던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정부에서는 정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총사퇴했고,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도 한국비료와 대구대를 국가에 헌납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 회장은 2년 뒤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동아일보 만평 ‘고바우 영감’은 이 만평 10주년 기념 지면(1969년 12월 30일자)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적군 일개 대대를 섬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 자리를 잃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수감됐다. 형무소에서 할복 소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 두 번 다시 ‘금배지’를 달지 못한 채 1972년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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