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9월 29일]1970 사상계 폐간,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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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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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실린 사상계 205호. 동아일보DB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실린 사상계 205호. 동아일보DB

“문화공보부는 월간 종합잡지 ‘사상계’를 인쇄시설 미비라는 이유로 지난 9월 29일자로 등록말소 처분했음이 2일 밝혀졌다. 문공부 당국자는 이날 64년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의 개정 이후로 사상계사에 대해 시설 보완을 여러 차례 독촉했으나, 이를 시행치 않고 계속 발행해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3항에 의거, 등록을 취소케 된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1970년 10월 2일자 7면)

이 소식이 실린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는 사상계가 정일권 당시 총리 앞으로 소원(訴願)을 제출했다는 보도가 실렸다. “사상계 측은 ‘그 시한이 지난 64년 12월 말인데도 그동안 문공부가 발행인 변경 등 사유에 대해 합법적인 등록증을 동사에 대해 두 번이나 발행, 사상계의 출판을 계속 인정해 왔다’고 밝혔다.” 1면에는 문공부가 “특정 기사와 관련된 정치적인 보복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해명했다는 소식, 신민당이 “오적(五賊) 시 사건에 대한 순전한 보복 조치”라고 비난했다는 소식이 함께 실려 있었다. (동아일보 1970년 10월 3일자 1면)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렸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정부패를 질타한 시였다. 이 작품이 문제가 된 거였다.

‘인쇄 시설 미비’라는 문공부의 해명은 어불성설이었다. 나흘 뒤인 10월 7일자 동아일보 3면 횡설수설 칼럼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법적 조건을 갖추지 못해 등록이 상실됐다고 보는 것은 아마 당국자 뿐 일부 세평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보기 싫어 없앤다’는 뒷소문이 번질는지도 모른다.”

‘사상계’의 폐간 조치를 비판한 동아일보 1970년 10월 7일자 3면 ‘횡설수설’ 칼럼.
‘사상계’의 폐간 조치를 비판한 동아일보 1970년 10월 7일자 3면 ‘횡설수설’ 칼럼.

사상계는 1953년 4월 창간호를 냈다. 발행인은 장준하. 초대 편집주간은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김성한이었다. 발간 초기엔 “받아주지도 않는 서점이 태반”(김성한 회고)이었지만, 발행부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적으로 늘었다. 1955년 3000부 정도였던 게 이듬해에는 3만 부가 넘었다.

사상계 지상(誌上)은 지식인들의 장이었다. 이숭녕 양주동 함석헌 윤형중 등이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1958년 8월호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필화 사건에 휘말렸고, 1959년 2월호의 ‘백지 권두언’이 주목받는다. 1960년 4·19혁명 직전, 예언 같은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한 저항도 계속됐다. 1965년 1월호에는 시국선언문 격인 편집위원 14명의 ‘우리의 제언’과 전 서울대 총장 장이욱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치는 공개장’이 게재됐다. 1966년 11월호엔 또 한 번의 ‘백지 권두언’에 이어 1970년 5월호 시 ‘오적’이 실렸다. 폐간 전 마지막 호였다.

그해 10월 7일자 동아일보 칼럼은 이렇게 적었다.

“민주사회에서 비평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안 된다. 정치에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듯이 이해와 상반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민주사회다. (…) 듣기 싫다고 감정적으로 다른 주장의 입을 함부로 틀어막을 수는 없다.” 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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