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조사는 사회 경제적 비용이 크다. 공론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3개월 동안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이끌었던 김지형 공론화위원장(59)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대법관을 포함해 27년간 판사 생활을 했지만 공론조사 결과를 내놓을 때 “제 생애 가장 엄중한 마음가짐”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을 가졌던 여파가 남아 있었다.
김 위원장은 신고리 5, 6호기 시민참여단이 내린 건설 재개와 원자력발전 축소라는 선택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참 절묘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원전 축소 정책을 권고한 것에 대한 월권(越權) 논란에 대해 “예상은 했지만 3개월 공론조사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 “공론조사 만능주의 경계해야”
24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는 20일 신고리 5, 6호기 건설 재개 권고안을 만들기 위해 닷새간 밤을 지새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김 위원장은 시민참여단의 2박 3일 합숙 토론도 지켜보는 강행군을 펼쳤다. 그는 “식당이나 카페 등지에서도 토론을 이어가는 시민참여단을 보면서 권고안을 제대로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건설 재개를 주장하는 단체와 중단을 주장하는 단체 모두 수긍할 만한 결론이 나온 것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첨예한 문제를 다루는 공론조사에서 이번처럼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초 정부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있었지만 공론화위 활동이 마무리되자 반발하는 주장은 거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가적 갈등과제를 소수 전문가들이 결정하고 추진하기보다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 직접 참여하고 여기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공론화 모델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일각에서는 “공무원 증원 문제도 공론화로 풀어 보자”는 등 모든 문제를 공론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공론화의 장점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낀 김 위원장이지만, 이런 움직임에 대해선 “공론화 남용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공론조사가 주는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부족했던 토론과 절충을 통한 갈등 해소를 보여줬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이 했어야 할 중재자 역할을 시민참여단이 대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공론조사는 대의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국회 등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공론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 “원전 축소 권고, 월권 아니다”
신고리 5, 6호기 공사 재개 권고를 끝으로 공론화위는 공식 해산됐지만 공론화위가 원전 축소까지 권고한 것을 두고 월권이 아니냐는 논란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은 “신고리 문제의 핵심은 탈(脫)원전 정책이었다. 공론화위가 이를 외면하고 원전 정책 권고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공론화위가 원전 정책 방향을 권고한 것이 잘못됐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월권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공론화위 조직 근거인 국무총리 훈령에 ‘그 밖에 공론화를 위해 필요성이 인정되는 사항’에 대해 의결할 수 있다는 항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야당 등에서는 지금도 정부와 공론화위가 원전 축소 정책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론조사 전에 사전 교감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공론화위가 정부 편을 들고자 했으면 원전 정책에 대한 조사를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원전 축소를 추진하는 정부가 정책이 뒤집힐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론화위에 그런 부탁을 할 리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신고리 5, 6호기 공론조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 위원장이 향후 정부 내 요직에 기용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에 그는 “대법관을 끝으로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의지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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