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잃은 엄마는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만 같다”고 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도 울지 않을 정도로 착했던 첫아들 하준이(4)와 황망하게 이별할 줄 꿈에도 몰랐다. 황금연휴를 맞아 놀러간 놀이공원 주차장에서 운전자가 타지 않은 차가 제멋대로 굴러 사람을 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량에 치여 머리를 크게 다친 뒤 마지막 숨을 내쉬던 순간에도 하준이는 울지 않았다.
○ 제동 풀린 차량에 아이가 또 쓰러졌다
사고는 최장 10일의 추석연휴가 시작됐던 지난달 1일 벌어졌다. 최하준 군 가족은 연휴 중 있었던 할아버지 생신을 겸해 경남 창원시 집에서 경기 과천시 서울랜드로 나들이를 왔다. 오전 9시 40분 동문주차장에 주차한 아빠 최모 씨(33)는 아내 고모 씨(35)와 함께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고 씨 옆에는 하준 군이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탈진 노면을 따라 미끄러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하준 군 가족을 뒤에서 덮쳤다. SUV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운전자(49)는 변속기 기어를 파킹(P)이 아닌 드라이브(D)에 뒀다. 차 범퍼 부분에 머리를 받힌 하준 군은 1시간 뒤 숨을 거뒀다. 아빠는 양 무릎에 피멍이 들었고 12월 태어날 셋째를 임신 중이던 엄마도 허리를 다쳤다.
14일 경기 부천시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고 씨는 “아무 잘못 없는 하준이가 왜 숨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임신 중이어서 사고 후 줄곧 병원에 있느라 고 씨는 하준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하준이는 사고 하루 전 사준 코트를 입고 뜨거운 화장로로 향했다.
지금도 고 씨 가족은 하준이와의 추억이 남은 창원 집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천에 있는 하준이 이모 집에 있다. 창원의 전자업체에서 에어컨 개발 업무를 하던 하준이 아빠는 일주일에 3번만 집에 내려가지만 일부러 늦은 밤에 들어가 잠만 자고 나온다. 하준이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부부는 지금도 둘째 딸이 볼까 아이가 잠든 밤에만 눈물을 삼킨다.
○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사고였는데…
고 씨 부부는 하준이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 도로교통법을 뒤졌다. 하지만 법 어디에도 비탈진 곳에 ‘주차 시 반드시 변속기를 파킹 위치에 놓거나 고임목을 놓고, 운전대를 우측으로 돌려 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의무를 규정한 곳이 없었다. 도로교통법 49조에 ‘원동기(시동)를 끄고 제동장치를 철저하게 작동시켜야 한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비탈진 곳에서 주차 시 안전조치를 의무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올 2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민홍철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대표발의로 제출됐다. 주정차 관련 34조를 개정해 비탈진 곳에서의 안전의무를 상세히 명시했다. 하지만 각종 정치 현안에 밀려 8개월째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게다가 경찰청은 “현행 49조로도 충분하다. 관리와 홍보를 철저히 하겠다”며 부정적이다. 민 의원은 “단속이 목적이 아니라 운전자 의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상식적인 걸 철저히 챙기자는 건데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고가 난 서울랜드 주차장처럼 도로는 아니지만 차량이 수시로 드나드는 ‘도로 외(外) 구역’의 안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토교통부 소관인 주차장법은 기계식 주차장에 대한 안전관리만 명시하고 있다. 비탈길과 같은 도로 형태별 안전조치, 안전 요원 및 경고문 배치와 같은 대책이 없다. 법적으로 도로가 아니다 보니 음주와 약물에 의한 사고가 아니면 경찰 신고와 조사의 의무도 없다. 경찰이 집계하는 교통사고 통계에 도로 외 구역에서의 사고는 빠져 있다. 준공 전 모든 도로가 거치는 교통안전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어린이가 많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내 도로, 공원 등이 법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서울시는 고 씨가 시 홈페이지에 올린 사고 관련 질의에 “경고문 부착, 안내방송을 철저히 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 더 늦기 전에 ‘하준이법’ 만들어주길
6일 고 씨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경사진 주차장의 경고문구 설치를 의무화하고, 운전자의 제동의무 미비로 인한 사고 시 처벌할 근거를 마련해 달라. 민 의원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국민청원을 올렸다. 마감일은 12월 5일. 바로 하준이의 생일이다. 청와대가 답변을 해야만 하는 20만 명을 채우는 것이 목표다. 15일 낮 현재 4만5000여 명이 동참했다.
부부는 하준이의 유해를 경기 용인시 추모시설에 안치했다. 공교롭게도 2015년 어린이집 앞에서 제동장치가 풀려 미끄러진 SUV에 치여 숨진 이해인 양의 유해도 이곳에 안치돼 있다. 같은 유형의 사고로 숨진 해인이와 하준이는 봉안당 1, 2층에 자리했다. 부부는 매주 하준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해인이에게 “하준이 잘 부탁해”라고 인사한다. 봉안당 내 하준이 봉안함 앞에는 큰 창문이 있다. 그 너머에 아빠 회사에서 만든 에어컨이 보인다. “아빠가 만든 에어컨 보며 외롭지 말라”는 아빠의 바람을 담아 고른 자리다.
고 씨는 “민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관심을 가져줄 수 있다면 하준이법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하준이와 해인이의 희생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일이 될 수 있다. 주차된 차가 나를 덮칠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는 나라가 아이 키우기에 안전한 나라가 맞느냐”며 억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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