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1992년 ‘대입 시험지 도난, 시험 연기’ 특종은 음주 덕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6일 11시 30분


1992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1992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 됐다는 소식이 들린 뒤로 1992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지면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돌아다니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원래 다음날 진행 예정이던 당시 후기대 입시 날짜를 2월 10일로 연기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에는 대입 시험을 전·후기로 나눠 치렀다.)

이 기사는 곧잘 동아일보 사내에서 ‘단군 이래 최대 특종’라고 불리곤 한다. 생각해 보시라. 온 수험생, 학부모가 목을 매는 게 대입 시험이다. 그 시험 전날 누군가 시험지를 훔쳐갔다. 만약 15일 아침 한 신문에만 ‘수능 시험지 도난, 시험 연기’라는 기사가 실렸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이 기사에는 저런 평가가 따라다닐 만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아일보만 이 기사를 특종 보도할 수 있던 걸까.
정답은 ‘술’이었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DB

당시 동아일보 국무총리실 출입 K 기자는 전날 과음으로 기자실에서 골아떨어진 바람에 이날 오전에 있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데스크가 간담회 내용을 보고 받으려고 전화를 할 때까지도 술이 덜 깬 상태. K 기자는 어떻게든 간담회 내용을 취재하려고 허둥지둥 기자실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그때 자기보다 더 허둥지둥 총리실로 뛰어가던 모 국장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 K 기자의 센스가 빛을 발한다. 그는 이 국장에게 “그래서 어떻게 한대?”하고 물었다. 사실 K 기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던진 말이었지만 국장은 “뭘 어떡해. 시험 연기 해야지”라고 이실직고했다. 이 한마디에 힌트를 얻어 취재한 끝에 이 소식이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전화위복이 아니라 ‘전주위복(轉酒爲福)’이라고 해야 할까.

술 좋아하는 걸로는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도 뒤지지 않았다. 사회부장이 등장하는 건 교육과 경찰 모두 사회부 담당이기 때문. 점심시간 전에 한번 기사를 마감하고 점심 식사와 함께 반주를 즐기던 사회부장은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한 TV 자막에 놀라 ‘물 먹었다(낙종했다)’는 생각에 헐레벌떡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기사가 바로 같은 회사 정치부(국무총리실 출입 기자는 정치부 소속이다) 특종이었던 것.

고백하자면 필자가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를 출입하던 기자 초년병 시절 K 기자가 담당 부장이었다. 어느 해인가 수능일 즈음 이 사건 취재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했다. “규인아, 단독 기사는 남의 ‘나와바리(출입처)’에서 쓰는 게 제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사를 다 네가 쓴 줄로 아는데 실제로 뒤치다꺼리는 원래 담당 부서에서 다 해주거든.”

2015년 동아일보를 떠난 K 기자는 동해안 모처에 사는 목수로 변신해 배(船)를 지으면서 언젠가 자기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할 날을 꿈꾸며 살고 있다. 한때 ‘저수지 몇 개(분량)는 마셨을 것’이라던 그였지만 이제는 강원도까지 손님이 찾아오면 좋은 술을 한 두 잔 즐기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동해안 모처에 있는 K 기자 ‘보트 쉘터(Boat Shelter)’. 사진에 있는 배 모두 K 기자가 직접 지었다. K 기자 페이스북
동해안 모처에 있는 K 기자 ‘보트 쉘터(Boat Shelter)’. 사진에 있는 배 모두 K 기자가 직접 지었다. K 기자 페이스북

“K 선배, 지난 번 뵈려다 못 뵈었을 때 같이 마시려고 준비했던 와인이 아직도 제 차 트렁크에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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