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성범죄자 누명 1년… 갈가리 찢긴 시인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4일 03시 00분


시인 박진성(39)은 지난해 10월 그 사건 이후 1년 넘게 ‘성범죄자’로 살고 있다. 성범죄가 아니라고 판명 났지만 소용이 없다. 박 씨의 강간 등의 혐의를 수사한 경찰과 검찰은 9월 “근거가 불충분하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허위사실로 박 씨를 고소한 A 씨(27·여)는 죄질이 나쁘지만 초범인 점 등을 고려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A 씨에 이어 박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던 한 20대 여성은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8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법적으로 억울함을 벗었지만 박 씨는 “차라리 징역살이가 낫다”고 했다. 사건 전에는 웃으며 안부를 건네던 이웃들은 그의 집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무서워서 못살겠다’ ‘더러운 놈’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박 씨가 18년간 알고 지내온 주민들이었다. 박 씨 부모의 삶도 달라졌다. 친척들의 연락이 끊겼고 경조사에 초대받지 못했다. 지인들은 “방송에서 얼굴과 실명을 공개할 정도면 네 아들 성범죄자가 확실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18일 트위터에 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미성년자인 저는 지난해 저보다 스무 살 많은 시인에게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박진성 시인임을 밝힙니다.” 이틀 뒤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나는 27세 여름 강간을 당했다. 이름은 박진성이며 직업은 시인입니다.”

익명의 트위터 게시물은 무차별 확산됐다. 문단 내 성폭력 논란이 일었다. ‘박진성 시인 미성년자 상습 성추행’이란 제목의 기사가 이어졌다. 박 씨는 기자로부터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못했지만 기사에는 실명과 사진이 노출됐다. 기사는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채워졌다. ‘죽어라’ ‘역겹다’ 등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트위터에 글이 올라온 지 36시간 만에 촉망받던 한 시인은 성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9월 서울의 240번 버스 운전사가 단 몇 시간 만에 아이 찾는 엄마를 저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힌 것과 비슷했다.

박 씨는 23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회적 생명이 끊겼다”고 말했다. A 씨의 첫 폭로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출판사는 박 씨의 시집 출판을 중단했다. 시집, 산문집 등 책 4권이 출간될 예정이었지만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다. 박 씨로부터 온라인으로 시 쓰기 교육을 받던 수강생 10여 명도 모두 떠났다. 박 씨는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도 저를 전염병 환자 대하듯 꺼렸다”고 토로했다. “시가 저의 전부인데, 사람들이 더 이상 제 글을 읽지 않고 책을 낼 수 없게 돼 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는 5월 정신과 상담 결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분노조절장애’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약을 한 번에 털어 넣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박 씨는 “숨은 붙어 있지만 내 목숨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고 했다.

박 씨와 비슷한 처지에 몰렸던 부산 동아대 손모 교수(당시 34세)는 지난해 6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달 전 교내에 붙은 ‘거짓 대자보’가 발단이었다. 교수 중 누군가가 여제자의 속옷과 엉덩이를 더듬는 사건이 있었는데 피해자도 아닌 한 여학생이 손 교수를 가해자로 지목한 것이다. 몇 달 뒤 ‘진범’이 드러나 파면됐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학생은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진실은 드러났지만 손 교수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박 씨도 성범죄 혐의를 벗었지만 그의 시집은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다. 출판사의 ‘출고정지’ 처분은 사건 이후 그대로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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