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오늘(11월 25일)자 동아일보 조간 2면은 ‘말코니 후작 일행 다섯 명이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 체제였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이 후작 이름을 ‘(구리엘모) 마르코니(1874~1937)’라고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 1909년 무선통신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탄 그 마르코니 후작이 식민지 조선에 도착했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을 ‘무전왕(無電王)’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기사 제목도 ‘무선왕 부부 근역에 제1보’였다.
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 입국을 앞두고 1933년 11월 21일 조간 6면에 ‘24일에 경성에 오는 마르코니는 어떤 사람’이라는 기사 하(下)편을 내보내면서 “만일 마르코니가 없었던들 오늘날과 같은 무선 전신과 라디오를 가졌을까 생각할 때 말코니를 무선 전신왕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남모를 수고와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마르코니가 가장 감사 인사를 많이 받은 건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 때였다. 전체 탑승자(2239명) 가운데 31.8%(317명)가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무선 전신을 통해 SOS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외신에서는 “마르코니가 타이타닉 생존자의 목숨을 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평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롱텀에볼루션(LTE)이나 와이파이(Wi-Fi) 역시 마르코니 후작이 없었다면 발전 속도가 더뎠을지 모른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중에는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무선 통신의 아버지로 알고 계신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43년 미국 대법원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테슬라가 마르코니보다 7년 앞서 1897년 무선통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한 건 맞다. 하지만 실용화라는 측면에서는 마르코니 후작이 더 빨랐다. 마르코니 후작은 1901년에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영국 사이에 무선통신을 성공시켰다.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마르코니 후작 소개 기사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도 장래에 조선의 마르코니가 생기기를 바라서 마지않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내용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스마트폰이 전 세계 곳곳에서 울리는 현재 이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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