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찾은 난민 3만명 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일 03시 00분


[토요판 커버스토리]국내 난민신청 3만명 시대
난민 울리는 날림 심사

지난달 25일 프로복싱 웰터급(66.68kg 이하) 경기에서 한국을 대표해 일본 바바 가즈히로(25)에게 3라운드 2분 54초 만에 KO승을 거둔 ‘난민 복서’ 이흑산(본명 압둘라예 아산·34·춘천아트 소속).

2015년 말 난민 지위를 신청한 그는 약 2년 만인 올해 7월 난민 지위를 얻었다. 지금도 각국에서 모여든 9000여 명이 난민 지위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기본적 인권을 찾아 국경을 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폴 비야 대통령(84)이 35년간 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 이곳에서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던 20세 청년은 2002년 군에 복싱 선수로 입대했다.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킥복싱과 장사로 근근이 살아온 그에게 동네 형들은 “군에서 복싱을 하면 월급에 집까지 준다”고 했다. 하지만 청년은 군에서 복서가 아닌 노예로 살았다. 월급과 집을 주기는커녕 상습적인 구타에 시달렸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 탈영을 시도했다 잡혀오면 모진 몽둥이질이 돌아왔다.

2015년 10월 자유의 기회가 찾아왔다. 경북 문경시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이라면 카메룬 군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기를 마친 날 오후, 코치들이 다른 경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동료 한 명과 경기 수당만 주머니에 쑤셔 넣고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시내로 무작정 달리며 할머니와 어린 딸이 어른거렸지만 ‘가족을 살리려면 떠나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길 가던 남성에게 짧은 영어로 무작정 ‘서울 가는 길’을 물었다. 두 청년이 버스로 서울에 닿았을 땐 깊은 밤이었다. 그는 곧바로 당국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송환될 때 박해받을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으려면 민감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데 당시 통역을 도와줄 사람이 부족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이어 “복싱으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챔피언이 되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이흑산처럼 한국 문을 두드리는 난민 신청 누적 인원이 지난달 말 3만 명을 돌파했다. 법무부는 5년 내 1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난민 인정 누적 인원은 767명에 불과하다. 난민은 어느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지만 이들을 보호할 국내법과 심사제도는 아직 과거형이다. 생사를 걸고 찾아온 ‘진짜 난민’은 제대로 구제하고 ‘가짜 난민’은 제대로 걸러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 부실 심사-처리 지연-인권무시… 우울증에 자살충동까지 ▼

난민들이 자신의 도피 이유가 담긴 모국의 사진을 들었다. 왼쪽부터 카슈미르 독립 시위를 보여주는 독립운동가 사다르 씨, 시리아 내전 사진을 든 피란민 누르 씨, 이집트 반정부운동 진압 사진을 든 반정부운동가 무함마드 씨. 난민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캐리커처로 표현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30대 청년 사다르 씨는 카슈미르 독립운동가였다. 인도 서북부의 카슈미르는 인도를 점령했던 영국이 1947년 철수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두 동강 났다. 1945년 광복 뒤 미국과 소련에 양분됐던 한반도를 닮았다.

조국의 소녀들이 점령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납치되는 참혹함을 보며 사다르 씨는 독립 투쟁을 결심했다. 당에 가입한 그는 언론에 자유를 요구하는 글을 싣고 반정부 집회를 주도했다. 그러던 2014년 파키스탄 경찰은 수배령을 내렸다. 동료들이 줄줄이 처형되자 그는 도피를 결심했다. 부랴부랴 가짜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날아온 곳이 인천이다.

“한국으로 오게 돼 다행이에요. 우리와 역사가 비슷하잖아요. 제 아픔에 공감해 주는 친구들이 많아요.”

사다르 씨처럼 모국의 독립,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 내전 등의 핍박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는 이주민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2013년 시행된 난민법에 따라 심사를 거쳐 송환 시 위협이 명확한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준다.

○ 심사관 전문성 부족으로 ‘진짜 난민’ 누락

죽음의 위협을 피해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은 심사 절차의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통역 오류가 생기는 등 여러 허점으로 정식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사다르 씨도 마찬가지였다. 사다르 씨에게 인천은 그저 환승지일 뿐이었다. 동지들이 사는 호주행 비행기를 타기 10분 전,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그를 막아섰다. ‘가짜 여권’ 때문이었다.

“난 호주에서 난민 신청을 할 겁니다. 여기서라도 난민 신청을 하게 변호사를 불러주세요.”

그는 영어로 목청 터져라 외쳤지만 허공에만 울렸다. 결국 한 외국인보호소에 갇혔다.

“제네바 난민협약은 가짜 여권을 쓰더라도 난민으로서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불법으로 보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어요. 나 같은 사람에게 가짜 여권을 문제 삼는 게 말이 됩니까.”

난민 신청서를 받는 일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보호소 직원에게 번번이 “신청서를 받아도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거친 말만 들었다. 직원에게 소란을 피우고 나서야 난민 신청서를 손에 쥐었다. 신청서와 함께 1600여 쪽의 증빙 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기각. 그가 받는 위협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가 덧붙었다.

이의신청, 행정소송으로도 퇴짜를 맞자 그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난민 신청-이의신청-행정소송’이란 지난한 과정을 2번 반복한 끝에 지난해 난민 지위를 받았다. 사다르 씨는 “1차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으면 난 2년 가까운 세월을 날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이의신청과 행정소송은 최근 4년 새 각각 11배, 21배로 급증했다.

○ 길고 긴 난민 심사 기간에 끼니 걱정

‘우리가 너와 네 아들을 죽이고 말 거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던 싱글맘 옥사나 씨(40)는 이런 협박 e메일에 시달렸다. 두 살배기 아프리카계 혼혈 아들을 혐오하는 이들의 글이었다. 안 그래도 고향 소도시에서 인종차별이 심해 이사를 왔던 터였다. 2008년 겨울 모자가 살던 고향 집에 누군가 불을 질렀다. 길 가던 학생들은 ‘니그로(흑인을 비하해 부르는 말)랑 잔 년’이란 욕설을 던졌다. 모자는 차별을 피해 가까운 핀란드, 영국 등을 전전하다가 2014년 말 한국에 여행을 왔다. 여행 이틀째 되던 날 아들은 갑자기 “엄마, 우리 여기에서 살자”라고 말했다.

“아들이 지하철에서 한 한국인 할머니한테 ‘이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선 놀랐대요. ‘똥’, ‘원숭이’라고만 불렸는데. 그렇게 한국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옥사나 씨는 2015년 7월 난민 신청을 했지만 인터뷰는 12월 중순이 돼서야 잡혔다. 4시간 동안의 인터뷰만 마친 채 다음 달 ‘기각’ 통지서를 받았다. 바로 이의신청을 했지만 승인 결정은 8개월 뒤에야 나왔다.

“난민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었어요. 이사를 갈지 말지, 취직은 도대체 언제 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했죠.”

2014년 종족 간 분쟁으로 한국으로 도피 온 예멘 공무원 A 씨는 난민 심사 과정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종족 간 분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진술이 번역본에 ‘원수를 져서 돌아갈 수 없다’고 돌변해 있었다. ‘조국이 언제든 안정만 된다면 내년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진술은 ‘내년에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에 찬 말로 오역됐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그는 결국 지난해 한국에서 강제 추방됐다.

전문가들은 난민 심사가 부실한 이유를 인력과 전문성이 모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1차 심사의 질을 높이는 게 관건”이라며 “정부가 독립된 난민심판원이 처음부터 심사하게 하고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훈련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난민 관련 정보를 조사하는 ‘국가정황정보’ 인력이 확충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 난민인데 난민이 아닌 ‘인도적 체류자’

한국에는 특수하게 서류상 난민 지위를 얻진 못하지만 난민과 비슷하게 체류 및 취업 기회를 얻는 ‘인도적 체류자’ 제도가 있다. 시리아 내전 피란민들이 이 지위를 받는다. 문제는 이들은 정식 난민이 아니어서 건강보험 등 기본 혜택을 못 받는다는 점이다.

경북에 사는 20대 시리아인 누르 씨는 시리아 알레포에서 전쟁을 피해 두 달마다 집을 옮겨 다니는 부모와 형제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인도적 체류자에게 주어지는 임시비자(G1 비자)를 본 회사 사장들은 일을 주지 않는다.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영어도 서툴러서 일 구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정식 난민은 아니지만 한국어를 배울 기회라도 주셨으면 좋겠어요.”

인권단체들은 인도적 체류자에게 취업, 건강보험 등 기본 혜택을 명시해 달라고 주장한다. 인도적 체류자의 애매한 지위를 해결하려면 난민법을 아예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건수 강원대 교수는 “인도적 체류자에게 난민법에서 정하지 않은 혜택을 주기 힘들다. 사회적 토론을 거쳐 난민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위은지 기자
#난민#이흑산#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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