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민의원 본회의는 근친혼의 금지조항에 있어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는 혼인하지 못한다’는 민법안의 정부 원안을 재석 110명 중 90표로 가결하였다.”(동아일보 1957년 12월 6일자 1면)
반대하는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찬성 의견 중 하나는 “무엇 때문에 조상 숭배와 아울러 우리의 자랑인 동본인척 불혼의 미풍을 파괴시키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857년 12월 7일자 1면).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는 민법안은 찬반 토론도 없이 가결됐다.
이후 논란은 계속됐다.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성씨를 물려받는 남계 혈족을 중시한 것으로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동국대 법대 한봉희 교수), “16촌이 넘어가면 동성동본끼리 혼인하더라도 우생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서울대 자연대 이정주 교수) 등(동아일보 1996년 6월 14일자 13면) 이념적, 과학적 반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수백 년 간 우리의 혼인 제도를 규율해온 미풍양속”이라는 유림의 반발도 컸다.
사실상 부부이면서도 동성동본이기에 혼인신고를 못하는 남녀를 위한 특례법이 1978년과 1988년, 1996년 시행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관습에 대한 저항은 컸다. 1979년에는 양가 부모의 결혼 반대로 특례법의 신고기한을 넘긴 여성이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발생했다(1979년 1월 19일자 7면). 1995년에는 가수 신해철이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한 노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불러 화제가 됐다.
지난해 한 케이블TV에서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동성동본 연인과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1988년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1990년대에 성인이 된 딸 성보라가 남자친구인 성선우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결혼은) 안된다. 호적에 배우자 아니고 동거인으로 찍힌다”며 화를 낸다. 이에 딸 보라는 “내년에 동성동본 결혼 한시적으로 결혼한대. 그때 결혼할게”라고 설득했다. 혼인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된 1996년을 가리키는 얘기다. 보라는 이어 “그 후 바로 동성동본 금혼 법률 효력 중지시킬 거래”라고 덧붙인다. 이듬해인 1997년 7월,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 금혼 규정에 위헌 판결을 내린 걸 뜻한다.
“헌재는 이날 ‘동성동본 금혼제가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성립, 유지라는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아니라 평등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판시,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였다.”(동아일보 1997년 7월 17일자 7면) 동성동본 금혼 무효가 선포된 건 금혼안이 통과된 지 4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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