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 낮추려 ‘기부 꼼수’… 판결 나면 후원금 끊는 성범죄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1일 03시 00분


‘면죄용 기부’ 2년간 101건 적발

“작년에 익명으로 후원금 900만 원을 냈는데요. 절반이라도 돌려주세요.”

얼마 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 한 남성이 전화를 걸어와 환불을 요구했다. 상담소 직원은 이 남성을 바로 알아봤다. 소액 정기후원이 대부분인데 익명 기부자가 한 번에 900만 원을 쾌척해 상담소에서 화제가 됐기 때문. 당시 고마운 마음에 은행에 기부자를 알려 달라고 했지만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고 해 단념한 터였다.

상담원이 환불을 요구하는 이유를 묻자 이 남성은 한참을 망설이다 실토했다. 아들이 강제 추행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2심에서 형량을 줄이기 위해 여성단체에 기부하라는 변호사의 조언을 따랐다는 것이다. 이 남성은 “은행 빚까지 냈지만 2심에서 형량이 생각만큼 줄지 않았다”며 사정했다. 상담소는 450만 원을 돌려줬다.

성폭력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처벌 받을 위기에 놓인 가해자나 가족들이 법원에서 선처를 받기 위해 ‘면죄용’ 기부금을 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성폭력상담소나 피해 여성 지원단체에 몇 달간 거액의 기부금을 낸 뒤 “뉘우치고 있다”며 재판부에 기부금 영수증을 들이민다. 10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 9월까지 전국 126개 상담소에서 성폭력 가해자 측 기부임을 확인한 건수는 101건에 달한다.

이들 ‘얌체’ 기부자는 감형을 받는 등 목적이 달성되면 곧바로 기부를 중단했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여성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한 혐의로 체포된 30대 공무원 A 씨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5개월간 후원금 50만 원을 냈다는 영수증을 법원에 제출했다. A 씨는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자마자 후원을 끊었다. 2심 재판부는 여성단체 후원을 반성의 증거로 인정해 A 씨에게 1심과 같은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환불해 달라는 사례도 많다. 지난해 말 한국성폭력상담소에 100만 원을 후원한 B 씨는 몇 달 전 상담소에 다짜고짜 환불을 요구했다. 상담소 측이 “본인이나 가족이 성폭력 관련 재판을 받고 있느냐”고 묻자 B 씨는 “그런 걸 왜 묻느냐. 내 돈 내가 돌려 달라는데 뭐가 문제냐. 무조건 입금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불순한 의도로 기부한 사실이 들통나 후원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이들은 한 번에 거액을 기부하거나 연말에 일괄 발급되는 기부금 영수증을 기부하자마자 끊어 달라고 요구한다.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기부자가 성폭력 관련 재판에 연루된 사실이 확인되면 기부 자체를 받지 않거나 기부금을 바로 돌려준다”고 설명했다. 여성단체가 이 같은 사유로 가해자 측에 기부금을 환급하려 했지만 받지 않자 재판부에 기부 사실을 신고해 강제로 반환받도록 한 사례도 있다.

성폭력 가해자가 ‘검은 기부’를 시도하는 이유는 법원이 여성단체 기부를 반성의 근거로 참작해 주기 때문이다. 이들의 판결문을 보면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납부하는 등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적시돼 있다. 상담소 관계자는 “기부금 영수증에는 납부 기간 없이 총액만 표시돼 진정성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변호사는 성폭력 관련 의뢰인에게 ‘감형 전략’으로 여성단체 기부를 조언하기도 한다.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후원금 납부 기록을 법원에 제출하는 방법으로 감형 효과를 자주 봤다”고 말했다.

여성단체들은 면죄용 기부를 막으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소액으로 나눠 기부하거나 기부자들이 단체에 알리지 않고 기부금 납입 내역 등을 법원에 제출하면 성폭력 연루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 상담소가 가해자들의 처벌 회피 창구로 악용되지 않도록 법원은 가해자의 여성단체 기부를 반성의 뜻으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동혁 기자 h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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