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팔을 벌려 서로 안았다. 겨울옷 너머로 박정구 씨(59)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박기월 씨(66·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14년 전 뇌동맥류 파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들 김상진 씨(당시 31세)가 남긴 심장이 여전히 박정구 씨의 몸속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8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와 한화생명 주최로 열린 ‘도너 패밀리 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손을 맞잡고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김 씨로부터 췌장을 이식받은 임명순 씨(58·여)와 이상신(45·간), 엄경희(56·여·콩팥), 윤옥희 씨(48·여·콩팥)가 차례대로 행사장에 도착해 박기월 씨와 포옹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2007년 김 씨의 3주기 모임 이후 처음이다. 박정구 씨의 아들(29)이 박기월 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에게 새 생명을 주신 덕에 제가 이렇게 자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박기월 씨는 “건강히 지내줘서 고맙다”고 간신히 대답했다.
김 씨는 결혼 두 달 만인 2004년 11월 29일 갑자기 쓰러져 뇌사에 빠진 뒤 12월 2일 박정구 씨 등 5명에게 생명을 나누고 세상을 떠났다. ‘뇌사 시 장기 기증’ 희망자 등록 제도가 도입된 후 이 서약을 실제로 지킨 것은 김 씨가 처음이었다.
박기월 씨는 처음엔 아들과 함께 장기 기증 서약을 했던 것 자체를 후회했다. ‘내가 괜한 일을 한 탓에 건강했던 아들이 갑자기 떠난 게 아닐까….’ 하지만 2005년 김 씨를 주인공으로 한 공익광고가 전파를 타고, 이를 계기로 이식 수혜자들과의 첫 만남이 같은 해 9월 성사됐을 때 마음의 짐이 사라졌다(본보 2005년 9월 5일자 A9면). 박기월 씨는 “아들의 생명을 나눠 가진 5명이 건강히 지내는 것을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니 흐뭇하다. 아직 아들이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식 수혜자들은 “새 생명을 선물받은 만큼 더 뜻깊은 삶을 살겠다”는 10년 전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윤 씨는 콩팥 장애인단체를 후원하고 환자를 돌보는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자신은 기적처럼 콩팥을 이식받아 혈액 투석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괴로움 속에서 사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임 씨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집 근처 복지회관에서 장애인시설에 보낼 지원물품을 포장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박정구 씨는 매일 무거운 톱을 들고 산에 올라 소나무재선충병 방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심장)을 더 건강하게 가꾸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박기월 씨가 “강원 평창군에 집을 새로 지었으니 놀러오라”고 말하자, 박정구 씨는 “직접 재배한 콩으로 쑨 메주를 잔뜩 메고 찾아가겠다”며 웃었다.
김 씨로부터 장기를 이식받은 박정구 씨 등 5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뇌사 기증 유가족과 합법적으로 교류하는 이들이다. 현행 장기이식법상 유가족과 수혜자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야 한다. 장기 매매를 막기 위해서다. 박정구 씨 등은 모두 공익광고를 통해 신원이 알려져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교류하고 있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사무처장은 “기증자 유가족을 설문한 결과 가장 기대하는 예우사업은 ‘이식인과의 만남’이었다”며 “유가족과 수혜자가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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