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세상에 나온 딸은 열흘을 채 살지 못했다. 그나마 엄마 아빠의 곁에 머물지도 못했다. 딸이 머물렀던 세상은 가로 30cm, 세로 60cm의 인큐베이터가 전부였다. 숨을 거둔 지 나흘째인 19일 딸은 더 좁은 세상으로 갔다. 지름 20cm, 높이 20cm의 납골함이다. 하얀 납골함을 끌어안은 아버지 정모 씨(38)는 검은 마스크를 쓴 채 떨리는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서윤아….”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불러주지 못한 딸의 이름이었다.
서윤이(가명)는 8일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에서 태어났다. 임신 31주 만에 나온 이란성 쌍둥이였다. 몸무게는 1.79kg. 1분 먼저 나온 오빠(1.98kg)보다 약간 작았다. 의료진은 “딸이 아들보다 더 건강하고 통상적인 미숙아보다 튼튼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 있는 두 아이가 집에 오길 기다리며 이름을 짓고 집 정리를 하느라 설렜다”고 말했다.
16일 오후 6시경 정 씨 부부는 쌍둥이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그때 몇몇 부모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며 항의하는 걸 봤다. 의료진은 “면회가 불가능하다”며 정 씨 부부를 돌려보냈다. 무언가 이상했다. 약 3시간 후 간호사가 전화하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심폐소생술 중이에요”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정 씨가 전화했지만 병원에선 “손이 부족하니 와서 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정 씨 부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신생아 중환자실은 아수라장이었다. 40cm 남짓한 딸의 가냘픈 몸 위로 의사가 온힘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사색이 된 엄마 김모 씨(32)에게 “미숙아들이 원래 약하고 아프다. 이렇게 놀랄 만한 이벤트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같은 중환자실에 있는 신생아 3명도 심정지 상태로 위독한 상황이었다.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던 1시간은 마치 1년 같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딸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의사 말대로 ‘이벤트’이길 바랐다. 하지만 정 씨 부부가 다시 마주한 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팔다리는 창백했다. 가슴에선 피멍이 보였다. 김 씨는 “축 처진 아이를 안았는데 너무 작고 가벼워 가슴이 찢어졌다”고 말했다. 같은 중환자실의 다른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들은 급히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18일 부검이 끝난 뒤 정 씨 부부 앞으로 하얀 상자가 돌아왔다. 상자에는 아무 이름이 없었다. 정 씨 부부는 15일에야 딸의 이름을 지었다. 딸이 숨지기 전날이었다. 아빠 엄마는 이름조차 한 번 부르지 못한 것에 가슴을 쳤다. 정 씨는 “내가 좀더 일찍 딸의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며 자책했다.
19일 인천시립승화원에서 서윤이의 화장이 이뤄졌다. 관에는 퇴원하면 씌워주려고 만든 모자와 인형이 들어 있었다. 전광판에는 ‘김○○ 후 아기’라고 표기됐다. ‘김○○’은 엄마 이름이다. 쌍둥이 중 둘째라 ‘후’가 붙었다.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된 뒤에야 납골함에 ‘정서윤’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새겨졌다. 이날 엄마는 서윤이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 대신 구청에 갔다. 그리고 딸의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동시에 했다. 정 씨는 “아이가 태어난 날이 결국 떠난 날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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