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 20명 앗아간 ‘가려진 비상구’
목욕용품 거대 수납장이 가로막고 늘 잠겨있어 사실상 무용지물
희생자들 위치 몰라 정문쪽 쓰러져… 남탕은 비상구 열어놔 전원 대피
칠흑 같은 어둠 속 유일한 희망은 비상구였다. 그러나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2층 여성 사우나에는 비상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뿐인 비상구는 2m가 넘는 거대한 수납장에 가려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마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며 늘 잠겨 있었다. 그렇게 ‘생명로(生命路)’가 막힌 탓에 누군가의 어머니와 누이, 딸 20명은 연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숨졌다.
21일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발생 당시 2층 여성 사우나의 비상구가 무용지물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결정적 이유다.
22일 소방당국과 본보 취재에 따르면 화재 당시 화염이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음에도 2층 내부는 대부분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됐다. 불길이 타고 올라간 사우나 쪽 유리창은 깨졌다. 하지만 탈의실과 휴게실 등 사우나 외부는 바닥과 가구에 그을음만 있었다. 사우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복층 구조의 황토방(수면실) 입구에는 그을음조차 없었다. 황토방 옆이 바로 비상구다. 이곳을 통하면 비상계단으로 불과 8초면 1층으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11명의 시신은 중앙 계단으로 향하는 사우나 정문 근처에 몰려 있었다. 나머지 9명은 탈의실 주변에 쓰러져 있었다. 비상구의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비상구 앞에는 목욕용품을 보관하는 대형 수납장이 서 있었다. 멀리서뿐만 아니라 근처에서도 비상구 위치를 알기 어렵다. 정전과 연기 속에서 비상구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상구 앞 수납장 2개 사이 공간은 약 50cm에 불과했다. 어른 한 명이 몸을 비틀어야 지날 수 있었다. 그나마 비상구는 늘 안에서 잠겨 있었다. 외부에서 누군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사우나 관계자는 “평소 사장이 ‘2층 비상구를 잠그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반면 남탕이 있는 3층에서는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2층과 같은 위치에 있는 비상구를 통해 대부분 탈출했다. 사우나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김모 씨(63)는 “남탕 비상구를 항상 열어 놓았다. 그래서 불이 났을 때 남탕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비상구로 나와 걸어서 계단을 내려왔다”고 말했다.
인명 피해를 키운 원인은 또 있다. 초기 진압에 필수적인 스프링클러가 모두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스포츠센터 건물주 이모 씨(53)는 “지난달 소방점검 때 스프링클러 동파를 발견해 수리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추가로 점검하려고 밸브를 잠가뒀다”고 말했다. 건물 주변 2차로 도로에 늘어선 주정차 차량은 소방차 진입을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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