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면 새까맣게 탔는데 뒤편 비상계단은 멀쩡… 비상구만 찾았더라도…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당시 불이 시작된 건물 전면은 새까맣게 타 본래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왼쪽 사진). 그러나
비상구와 비상계단이 있는 건물 뒤편은 간판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소방 당국은 비상계단의 존재를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21일 오후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1층. 주차장에 있던 한 남성이 “불이야!”라고 외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에 있던 직원 A 씨는 옆에 있던 소화기를 들고 관리인 김모 씨에게 건넸다. 불은 아직 1층 주차장 천장에서만 번지고 있었다. 소화기로 진화가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소화기는 먹통이었다. 김 씨가 “소화기가 안 돼!”라고 소리쳤다. A 씨가 급하게 다른 소화기 두 대를 찾았다. 이미 불붙은 차량에서 ‘펑’ 하고 폭발음까지 났다.
29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는 소방설비의 총체적 부실이 빚은 참극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4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건물 소방점검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민간 소방점검업체 J사는 경보와 피난, 소화 등 5개 부문에서 30개 항목 67곳을 수리 대상으로 판정했다.
불이 시작된 1층에서만 19곳이 확인됐다. 1층 비상계단에 있던 소화기는 사용 연한(10년)을 넘겼다. 스프링클러 밸브는 배관 누수로 알람밸브가 폐쇄된 상태였다. 화재 시 벨소리를 울리는 경종(警鐘)도 불량이었다. 필로티 구조 건물에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호스 릴과 이산화탄소 소화설비에는 표지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표시등도 파손돼 있었다. 화재감지기는 1층에서만 5곳이 고장 난 상태였다. 피난구 유도등도 4개나 꺼져 있었다. 이런 문제는 여탕이 있는 2층 사우나 내부를 제외한 모든 층(1, 3∼8층)에서 비슷했다.
하지만 20명이나 숨진 2층 여탕 내부에서는 별다른 지적 사항이 없었다. 당시 2층 내부에서는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건물 세입자들에 따르면 11월 말 당시 남성 3, 4명이 소방점검을 실시했지만 여탕이 영업 중이라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목욕용품 수납장이 비상구 위치를 가리고 탈출로 폭이 50cm 정도로 좁아진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상구는 가장 중요한 소방점검 대상이다. 비상구 근처 물건 방치는 곧바로 시정 조치를 내려야 한다. 비상구 구조에 문제가 있으면 일정 기간 내 반드시 보수하도록 해야 한다. 해당 건물의 소방점검 결과를 살펴본 한 소방전문가는 “2층 여탕 안에 들어가서 비상구를 봤다면 문제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아무 지적이 없었다는 건 점검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건물주 이모 씨는 “보수공사 규모가 클 것 같아 직원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따로 업체를 불러서 공사하려 했다”고 말했다.
○ 누수로 인한 합선 가능성 수사
경찰은 24일 건물주 이 씨와 관리인 김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불이 난 당일 김 씨 등은 1층 주차장 천장에서 얼음 제거 작업을 했다. 그로부터 1시간도 안 돼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주 이 씨에 따르면 이전에도 1층 천장 배관이 동파돼 하루 1, 2회씩 물을 퍼냈다고 한다. 또 겨울이 되자 천장에 고인 물이 얼어 생긴 고드름이 주차장으로 떨어져 아침마다 이를 제거하는 일을 했다.
경찰은 약 한 달 전 천장에 설치한 배관 동파 방지용 보온덮개가 화재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고 있다. 김 씨가 얼음을 제거하다가 보온덮개에 엉켜 있는 전기회로나 전선 등에 물이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지인에게 “누전으로 인한 화재인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 때 사우나를 이용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치료를 받고 있는 한 생존자의 부인 박모 씨는 평소에도 물이 새는 천장에서 공사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말했다. 박 씨는 “천장에서 무슨 공사 같은 걸 할 때마다 전선들이 물에 젖은 채 축 늘어져 있어 불안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다른 곳으로 사우나를 옮겼는데 남편은 계속 다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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