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에서 실종된 준희 양(5)이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고모 씨(36)가 딸을 잃어버린 날이라고 밝힌 11월 18일로부터 41일 만이다. 그러나 준희 양은 이보다 7개월 전에 이미 숨졌다. 고 씨는 동거녀의 모친 김모 씨(61)와 함께 한밤중 준희 양 시신을 야산으로 옮겨 암매장했다. 이어 고 씨와 김 씨는 준희 양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8개월 동안 ‘다정한 아버지’와 ‘자상한 할머니’를 연기했다. 뻔뻔한 연극이었다.
○ “잠자다 죽었다”는 친부(親父)
전주 덕진경찰서는 고 씨와 김 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29일 밝혔다. 두 사람에게는 일단 숨진 준희 양을 암매장한 혐의(사체유기)가 적용됐다. 이들은 준희 양이 잠을 자다 갑자기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돌연사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경찰에서 준희 양이 4월 26일 오후 11시경 토사물 탓에 기도가 막혀 숨졌다고 말했다. 고 씨는 다음 날 오전 1시 전주시 덕진구 김 씨 집을 찾았다가 딸의 죽음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날 새벽 두 사람은 준희 양의 시신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전북 군산시 내초동 고 씨의 선산으로 갔다. 1시간 반 동안 나무 밑에 30cm 깊이로 구덩이를 팠다. 보자기에 싼 준희 양 시신을 묻었다. 준희 양이 좋아하던 인형 한 개도 함께 매장했다.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암매장한 이유에 대해 고 씨는 “준희가 숨지면 생모와의 이혼 소송과 양육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죽으면 빨리 땅에 묻어야 한다고 김 씨가 말해 그대로 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거녀 이모 씨(35)는 암매장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김 씨도 “딸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씨의 공모 여부를 조사 중이다. 특히 이 씨가 준희 양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확인 중이다.
○ 8개월에 걸친 비정한 ‘연극’
준희 양 시신을 암매장하고 이틀 뒤 고 씨 등 3명은 1박 2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이어 고 씨는 8개월 동안 김 씨에게 매달 60만∼70만 원을 송금했다. 고 씨는 이 돈이 준희 양 양육비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7월 22일 준희 양 생일이라며 미역국을 끓였다. 그리고 이웃과 지인에게 “손녀(준희 양) 생일이라 미역국을 끓였는데 같이 먹자”고 나눴다. 이웃에게 “손녀를 돌봐야 한다”며 일찍 귀가한 날도 많았다. 범행을 감추기 위한 꼼꼼한 각본이었다.
김 씨는 8월 말 준희 양이 숨진 원룸에서 근처 다른 원룸으로 이사 갔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0만 원짜리였다. 새 원룸에는 아동용 신발과 장난감 머리띠를 일부러 보란 듯이 갖다 놓았다.
고 씨와 이 씨는 이달 8일 오후 1시경 덕진서 아중지구대를 찾았다. 두 사람은 “준희가 11월 18일 우아동 원룸에서 사라졌다”고 신고했다. 이때 고 씨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 씨에게 화를 냈다. 두 사람은 “준희를 네가 데려갔잖아”라고 1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이기까지 했다. 고 씨는 이후 원룸을 찾아온 경찰관 옷을 붙잡고 “딸을 꼭 찾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 딸 암매장하고 ‘건담’ 자랑한 아버지
29일 확인한 고 씨의 아파트 현관 앞 복도에는 ‘건담’ 로봇 플라모델 제품 10여 개가 진열장에 있었다. 건담은 일본의 유명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고 씨 지인들은 “고 씨가 건담을 지독하게 좋아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고 씨는 딸을 암매장한 다음 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이 조립한 건담 모델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또 암매장 13일 후인 5월 10일 인터넷 카페에 건담 제품 한 개를 10만 원에 판다는 글도 게시했다.
경찰은 준희 양의 사망 원인이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준희 양은 생모의 집에 살 때 2년간 갑상샘 기능 저하로 30차례 치료를 받았다. 올 1월 준희 양 생모는 양육비를 올려달라며 자녀 3명과 함께 고 씨의 직장을 찾았다. 고 씨는 준희 양만 양육하기로 했다. 경찰은 처방전 발급 여부 확인을 통해 이때부터 준희 양이 치료약을 먹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 올 3월 준희 양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어린이집 관계자는 “준희의 혀가 퉁퉁 부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동거녀 이 씨는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가 아파서 3개월 후 보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고 씨 등이 준희 양에게 일부러 약을 먹이지 않았을 가능성을 확인 중이다. 고윤우 서울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이 병은 갑상샘 호르몬제를 매일 복용하지 않으면 온몸이 붓고 수개월 내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은 또 준희 양이 올 2월 23일과 3월 19일 이마, 머리가 찢어져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폭행 등 학대에 의해 숨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근거다. 김 씨는 처음 경찰 조사에서 “준희 양이 무언가에 부딪힌 뒤 쓰러졌다”고 말했다가 진술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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