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일본 대지진 때 친구 한 명을 잃었다. (중략) 그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내가 사는 곳이 지진으로 흔들리자 ‘내가 그 친구였더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살아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발간된 책 ‘우리 가족 재난 생존법’(오가와 고이치 지음·21세기북스) 머리말 내용이다. 29명의 목숨을 앗아간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로 깊은 슬픔에 빠진 국민들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사고 건물주가 구속되고 관리인도 입건되면서, 그동안 재난 상황을 남의 일처럼 여겼던 건물주나 관리인의 경각심도 높아지고 있다.
“안전은 결국 관심이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신 재난 대비 시설을 갖추고 시스템을 정비해도 시민들이 현장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소방방재학 관련 교수 6명의 조언을 얻어 화재 대비와 대피 요령을 알아봤다.
○ 불나면 ‘패닉’…미리 대비해야
예고 후 찾아오는 재난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패닉에 빠진다. 평소 알던 내용도 잊는다.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단순해진다. 복잡한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최대한 간결하고 직관적인 대피 정보가 필요한 이유다. 화재 대피 요령 등을 알리는 안내나 표지판은 문장보다 단어 형태로 간략하게 전달해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절대 이용하지 않도록 하며 계단을 이용합시다’ 같은 문장보다는 ‘화재 시 계단 이용(엘리베이터 ×)’이 더 좋다는 것.
화재 위치와 대피 정보 등을 방송으로도 신속히 알려야 한다. 올 2월 일어난 경기 화성시 동탄 메타폴리스 부속 상가 건물 화재가 ‘나쁜 본보기’다. 당시 관리업체는 화재경보기와 유도등 등을 정지시켜 놨다가 불이 난 직후 다시 켰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대피한 뒤에야 안내방송과 사이렌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이 사고로 4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유독가스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다.
가장 좋은 건 불이 난 위치를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적절한 대피 경로를 파악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통유리 건물이나 지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화재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김유식 한국국제대 교수(소방방재학)는 “대피를 위한 1차 역할은 건물 관계자가 맡는다. 관리자부터 안전에 관심을 갖고 스프링클러를 꺼놓는 등의 잘못된 조치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 우리 집·회사의 대피시설부터 알아 놓아야
지난해 2월 부산 해운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오전 5시경 일어난 불로 현관 밖으로 대피하지 못한 이들은 베란다로 피신했다. 이들은 베란다 벽을 뚫고 이웃집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불은 아파트 내부만 태우고 20여 분 만에 꺼졌고 인명 피해는 없었다.
가족의 목숨을 살린 건 ‘경량 칸막이(아파트 비상탈출구)’였다. 1992년 개정된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설치가 시작됐다. 2005년부터 방화문으로 된 대피 공간 또는 경량 칸막이 설치를 의무화했다. 1992∼2005년 지어진 아파트는 경량 칸막이가 설치됐을 가능성이 높다. 두께가 얇은 석고 등의 소재로 돼 있어 손으로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난다. 일부 건물에는 자체 제작했거나 지방자치단체가 배부한 비상탈출구 표시가 붙어 있다.
완강기는 설치를 의무화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2006년 아파트나 빌라 등 3∼10층 건물에는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완강기는 지지대에 걸 수 있는 고리와 벨트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계단을 이용해 대피할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이용하는 수단이다. 1회용 완강기도 있다. 자신의 사무실이나 집에 어떤 종류의 완강기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 노인이나 어린이의 경우 이용이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소방안전체험관 등을 통해 실제 체험하는 게 좋다.
건물 비상계단과 연결된 방화문에 자동폐쇄장치가 잘 설치돼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환기나 답답함 등을 이유로 일부러 작동하지 않도록 해놓거나 도어 스토퍼(노루발)를 설치해 놓는 경우가 있다. 방화문이 열려 있으면 화재 때 불이 번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수 있어 위험하다.
○ 초기에 중요한 건 ‘속도’
소방방재학 교수들은 발화(發火) 단계부터 신속하게 움직여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소방청의 국민행동요령 매뉴얼 등에 따르면 처음 불이 난 걸 확인한 사람은 “불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쳐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근처 소화전 등에 설치된 비상벨도 눌러야 한다.
화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건물에서 나오는 방송 등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유도등과 비상구 위치를 빠르게 확인해야 한다. 만약 비상구로 피난이 불가능하더라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정기신 세명대 교수(소방방재학)는 “건물은 양방향 피난이 가능한 ‘Fail-Safe(안전한 실패) 원칙’으로 설계돼 있다. 다른 비상구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화재 상황에서 불만큼 무서운 것이 유독가스 연기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화재로 인해 숨진 사람은 306명. 이 중 187명(61.1%)이 연기나 유독가스 흡입으로 인해 숨졌다. 통상적으로 유독가스 농도가 높을수록 까만색 연기가 발생한다. 까만 연기가 가득하다면 무리한 시도는 금물이다. 김 교수는 “복도 등에 유독가스가 가득한데도 살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면 오히려 생존이 가능한 ‘극한 시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낸다. 유독가스로 대피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문을 열지 말고 구조를 기다리는 게 맞다”고 말했다.
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옷 등을 물에 적셔 문틈을 막고 구조를 기다리는 게 낫다. 공하성 경일대 교수(소방방재학)는 “미국 매뉴얼 중에는 유독가스가 나올 경우 문틈을 막고 물을 튼 뒤 화장실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라는 내용도 있다”고 말했다.
○ 몸 낮춰 대피…유리는 모서리부터
연기가 많은 상황에서 대피할 때는 물수건 등을 코에 대고 몸을 숙여 낮은 자세로 이동한다. 이 역시 질식 위험을 막기 위해서다. 통상 연기는 천장부터 차오르고, 가장 깨끗한 공기는 바닥으로부터 30∼60cm 위에 있다. 불을 통과해야 한다면 담요나 수건 여러 장을 물에 적신 뒤 몸과 얼굴을 감싼다.
바깥 상황을 모르는 상황에서 문을 열어야 한다면 손등을 가져다 대는 등 문 손잡이에 손을 살짝 대봐야 한다. 손잡이가 뜨겁다면 다른 대피 방법을 찾는 게 좋다. 불이 문 앞까지 번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화재 장소에서 대피할 때 문을 열고 나간다면 문을 다시 닫아야 한다. 불이 번지거나 연기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유리를 깨고 나가야 할 때는 한가운데보다는 아래쪽 모서리를 공략해야 한다. 유리 전체의 힘이 모이는 가운데는 잘 깨지지 않는다. 유리를 깬 뒤 모서리를 잘 정리해 추가 부상이 없도록 하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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