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 막아선 차, 美라면 당장 부쉈다 3일 서울 강북구의 한 도로변에 설치된 소화전 앞에 건어물 판매
트럭 한 대가 서 있다. 전동휠체어의 도난 방지용 잠금장치도 같은 소화전에 채워져 있다. 근처에 불이 나도 소화전 사용이
불가능해 보인다(위쪽 사진). 2014년 미국 보스턴의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불법 주차된 BMW 승용차 창문을 깬 뒤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폭스뉴스 홈페이지 캡처
참사 부르는 불법 주차를 뿌리 뽑자는 여론이 뜨겁다. 불법 주차에 무관용으로 대응하는 외국과 쩔쩔매는 국내 상황을 비교한 동아일보 보도(1월 3일자 A12면 참조)에는 “부끄럽다” “진짜 대한민국의 적폐다” “이번마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한국의 비뚤어진 주차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불법 주차를 사소한 실수 정도로 여기는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으면 소방차를 가로막고 소화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불법 주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불법 주차 탓에 소화전이 사라졌다
3일 오후 서울 강북구 노해로. 2차로에 건어물을 잔뜩 실은 1.5t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오징어 한치를 판다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트럭은 인도 위 빨간색 소화전과 붙다시피 가깝게 서 있었다. 소화전 옆에는 주인 모를 전동휠체어 한 대가 있었다. 전동휠체어와 소화전은 두꺼운 자전거용 잠금장치로 연결돼 있었다. 근처 상인은 “최근 며칠 동안 하루 6, 7시간씩 저렇게 전동휠체어가 묶여 있었다”고 말했다.
트럭 운전사 김모 씨(51)는 “장사할 때마다 늘 차량을 세우는 곳이다. 소화전 앞이라 안 되는 건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무슨 일 생기면 금방 빼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했다. 말하는 내내 불쾌한 표정을 보인 김 씨는 잠시 후 현장을 떠났다.
화재 현장에서 소방펌프차의 물이 떨어졌을 때 남은 수단은 사실상 소화전이 유일하다. 소방차가 화재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을 때도 소화전이 중요하다. 이곳에서 소방호스를 연결하면 불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소화전 5m 이내는 모든 차량의 주차가 금지된다. 어기면 도로교통법에 의해 과태료 4만, 5만 원이 부과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소화전은 마치 ‘유령’처럼 취급받고 있다
이곳에서 100m가량 떨어진 한 오피스텔 건물 옆에 설치된 소화전은 아예 연두색 철제 펜스 안에 ‘갇혀’ 있었다. 소화전과 1m 정도 떨어진 곳에 문이 달려 있었지만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근처에 화재가 나도 문을 열지 않고서는 소화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건물 관계자는 “몰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아 펜스를 설치했다. 소화전 사용을 위해 구멍을 만들어 놓는 걸 깜빡했다”고 해명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주변 한 상가의 소화전 앞에는 승용차 3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차량과 소화전 사이는 불과 50∼60㎝에 불과했다. 상가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최모 씨(52·여)는 “주차 금지용 물통을 세워놔도 언제인지 모르게 치우고 주차를 하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건물 근처 또 다른 소화전도 액세서리 배달 차량에 1시간 넘게 가로막혀 있었다. 이 차량의 번호판은 신문지로 가려져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운전자는 “평일 도심에 납품하러 다니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3, 4년 전부터 설치된 지하식 소화전은 더 문제다. 길 위에 튀어나온 소화전이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새로 등장한 방식이다. 마치 맨홀처럼 땅에 매립하는 형태다. 얼핏 보면 맨홀 뚜껑처럼 보인다. 노란색 테두리가 그려져 있고 ‘소화전’ ‘주차 금지’ 등 표시가 돼 있다. 하지만 좁은 주택가 골목 등에 설치된 지하식 소화전은 일반 소화전보다 더 무시당하기 일쑤다.
○ ‘불법 주차=범죄’ 인식 필요
3일 서울 마포구 양화로의 철거 공사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골든타임 5분을 지킨 덕에 화재는 진압됐다. 인명피해도 없었다. 남모 소방관(38)은 “지하철 홍대입구역 주변은 항상 교통량이 많지만 현장에 불법 주차 차량이 없어 수월하게 현장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화재를 목격한 직장인 유모 씨(32)는 “당시 차량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연기가 심했다. 만약 불법 주차 차량이 있었다면 훨씬 위험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올 6월 27일부터 소방차 통행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처벌이 강화된다. 소방차 등 긴급차량의 통행을 방해하는 운전자에게 부과할 수 있는 과태료는 최대 200만 원까지 가능해진다. 소방청은 현재 시행령을 마련 중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과태료 기준과 액수가 담길 예정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전망이 많다. 현재도 도로교통법에 의해 과태료를 최대 20만 원까지 부과할 수 있다. 문제는 경포119안전센터에 불법 주차한 차량처럼 현장에서 과태료 부과가 엄격히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불법 주차 행정이 제각각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현재 주정차 금지구역은 경찰이 정한다. 그러나 단속은 지방자치단체가 맡고 있다. 지자체 중에는 민원과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단속에 손을 놓는 경우가 많다. 올해처럼 지방선거가 있을 경우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 지자체가 불법 주차 단속 실적을 의무적으로 공개토록 하는 조치도 검토할 만하다.
자유한국당 홍철호 의원(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은 “과태료 상한선이 올라갔지만 행정처분의 법률적 특성상 실제 부과 금액은 더 적게 부과되는 일이 많다. 소방활동을 방해하는 걸 범죄로 인식해 과태료가 아닌 벌금 등의 형사처분으로 벌칙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또 법원이 중과실을 판단해 최대 200만 원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소방기본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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