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환갑에 언론인에서 법조인 변신… “인권보호에 힘쓰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8일 03시 00분


<89> 박연재 변호사

역대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인 박연재 변호사가 3일 광주고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만큼 지역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고민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역대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인 박연재 변호사가 3일 광주고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만큼 지역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고민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언론인에서 법조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66세 변호사의 언변은 거침이 없었다. 목소리는 취재 현장을 누비던 현역 시절처럼 카랑카랑하고 힘이 넘쳤다. 안경 너머로 법전을 뒤적이는 눈매 또한 매서웠다. 사법시험 사상 최고령 합격자로, 올해로 변호사 개업 7년째를 맞은 박연재 변호사를 3일 만났다. 그의 법률사무소는 광주지법 앞 왼편 빌딩 4층에 자리하고 있다. 지은 지 30년이 넘은 건물이라 이름도 없다. 66m² 남짓한 사무실은 단출했다. 사무장도 없이 여직원 한 명과 사무실을 꾸려가는 그는 서류 더미에 묻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식뻘 되는 변호사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법조인으로서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근황을 묻자 “변호사 업계가 전반적으로 불황이어서 수임 건수가 많지는 않다”며 “그래도 후배들 소주 값 정도는 벌고 있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는 어렵게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지만 ‘초짜 변호사’란 말을 듣지 않도록 소송을 맡으면 자료 조사를 꼼꼼히 한다. 변론 때 상대 변호사가 작성한 준비답변서가 마음에 들면 복사해서 볼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다. 그는 “법정에서 학교 후배인 판사나 검사, 연수원 동기들을 만나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혹시라도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 언론인에서 법조인으로

환갑의 나이에 변호사가 된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드라마틱하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그는 1970년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전남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에만 매달리기에는 사회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은 부정 선거 규탄과 교련 수업 반대, 중앙정보부 폐지 등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시국이 어수선했다. 그해 10월 15일 전국 대학에 위수령이 내려졌고 그는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때 ‘주홍글씨’는 1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을 마치고 월세방을 전전하며 공부한 끝에 1981년 사법시험 1·2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3차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 과거 시위 전력 때문이었다. 비록 그는 떨어졌지만 당시 사시 23회 합격생들은 쟁쟁했다. 조희대 대법관과 유남석 헌법재판관, 황교안 전 국무총리,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한상대 전 검찰총장 등이 23회 출신 법조인들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기 위해 그해 한국방송공사(KBS) 기자 공채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법조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1982년 면접장을 다시 찾았다. 당시에는 사시 3차 면접 탈락자는 이듬해 1·2차 필기시험이 면제됐다. 면접 장소였던 옛 중앙청 앞 관공서에 근무하던 한 선배가 넌지시 “자네는 안 되겠다”고 귀띔을 해줘 이번에도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불합격 통보를 받고는 기자를 운명으로 알고 30년을 살았다.

무너진 그의 꿈이 다시 피어난 것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의 권고였다. 위원회는 2007년 시위 전력으로 사법시험 면접에서 탈락한 응시자 10명에게 연수원 입소 기회를 주도록 법무부에 권고했다. 이듬해 1월 박 변호사는 3차 면접을 다시 본 뒤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사법시험 사상 최고령 합격(56세)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38년, 사법시험을 본 지 27년 만에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10년 KBS 광주방송총국 심의위원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그는 사법연수원(41기)에 들어가 예비 법조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박연재 변호사가 사법시험을 본 지 27년 만에 받은 합격증.
박연재 변호사가 사법시험을 본 지 27년 만에 받은 합격증.

○ 환갑에 사법연수원 수료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나이 때문이었다. 연수를 마치는 2012년이면 그는 환갑이었다. 고민하던 그에게 힘이 돼 준 분은 팔순의 고교 은사였다. “박 군, 아직도 안 늦었네.” 옛 스승의 전화 한 통을 받고 그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 말은 2010년 2월 25일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서 ‘말과 말’에 선정돼 전국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는 손에서 놓은 지 30여 년이 지난 법전을 다시 잡았다.

주위의 격려 속에 시작한 사법연수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아들딸 정도 나이의 연수원생들과 경쟁이 되겠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했죠. 하지만 아무래도 기억력이나 체력이 달려 고생 좀 했습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되는 수업과 시험,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복습과 세미나 등 ‘살인적인’ 사법연수원 일정은 그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래도 위안거리가 없지는 않았다. 연수원은 그가 강의실 앞자리에 앉도록 배려해줬고 그가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앉은 자리 주변에 27년이나 어린 동기들을 배치해줬다. 연수원장과 교수, 동료 원생들은 그를 ‘고문님’이라고 부르며 예우해줬다. “모든 시험이 상대평가여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크게 뒤처지지는 않았습니다. 성적은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비록 하에 속했지만 꼴찌는 안 했어요.”

연수원 시절 그는 형사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연수생들은 수료를 앞두고 6개월 동안 법원, 검찰, 변호사 사무실에서 각각 2개월씩 시보수습을 받는다. 2013년 서울고법 민사10부에 소속돼 실무수습을 받던 그는 택시운전사를 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한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을 맡게 됐다.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고 정상자료를 제출하는 등 성심껏 변론한 덕분에 피고인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재판 결과를 보고 동료 연수원생들이 무척 부러워했어요. 첫 수임 사건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이끌어 냈으니 그럴 만도 했죠. ‘시보 특혜’란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고요.”

○ 6·25전쟁 민간인 희생 각별한 관심

박 변호사는 법조인 가족이다. 현직 검사인 딸(39·연수원 38기)과 변호사인 사위(41·연수원 39기)는 그의 법조계 선배다. 연수원 43기인 며느리(35)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요즘 법조인 가족이 많지만 아버지와 딸, 사위, 며느리가 사시에 합격한 집안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라며 “10여 년 전 중등교원으로 명예퇴직한 아내의 헌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아내 이외순 씨(65)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2012년 3월 지금의 사무실에서 개업했다. 너무나 먼 길을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 나서 법복을 입게 됐으니 감개가 무량했죠. 어렵게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으니 법으로부터 소외된 이웃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는 지역 법조계에서 6·25전쟁 민간인 희생사건의 전문 변호사로 명성이 높다. 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는 2012년 고향 사람들을 통해 영암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을 접했다. 그는 영암 민간인 희생 사건의 피해자 유족 3명과 2012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과거사위, 유족 진술 등을 근거로 2014년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전남 화순, 나주 등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 의뢰가 잇따랐다.

2016년 12월 ‘화순·나주 민간인 희생 사건’의 피해자 유족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또다시 승소했다.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 ‘확인’이나 ‘추정’ 결정 사건의 경우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은 있었으나 불법성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불능’ 결정에도 대법원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변호사 생활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찾는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만큼 다시는 역사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권 보호에 힘쓰겠다는 늦깎이 변호사의 다짐이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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