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친할머니 못구하고…” 가슴 친 소방관 손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일 03시 00분


밀양 참사 조모 잃은 20대 구급대원

‘어떡하노, 어떡하노….’

지난달 26일 오전 경남 밀양소방서 구급대원 A 씨(29·여)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세종병원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병원 3층에 입원 중인 할머니 강모 씨(88) 걱정 때문이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A 씨는 현장에서 할머니의 생사를 챙기지 못했다. 가까스로 구조된 다른 고령 환자들을 응급처치한 뒤 쉴 새 없이 병원으로 이송했다. 구급차를 타고 현장과 병원을 오가는 내내 머릿속에 할머니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A 씨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저 할머니가 무사하길 빌고 또 빌었다. 손녀의 애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강 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A 씨는 구급대원 임무가 모두 마무리된 뒤에야 가족을 통해 할머니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 빈소는 장례식장이 부족해 화재 사흘 뒤에야 차려졌다. 빈소에는 ‘밀양소방서 직원 일동’이라고 적힌 조화가 놓였다. A 씨 사연을 접한 동료들이 보낸 것이다. 31일 치러진 발인에서 A 씨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고 할머니 영정을 따랐다.

A 씨는 이날 기자와 만나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이자 유가족이라는 처지에 너무 혼란스럽다”며 입을 열었다. A 씨는 올해 3년 차 소방관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제3회 경남 소방안전강사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2월 전국 대회에 경남도소방본부를 대표해 출전할 예정이다.

불이 난 날 A 씨는 비번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 이른 아침 대형 화재가 났다며 비상소집명령을 받는 순간 깜짝 놀랐다. 출동 장소가 다름 아닌 세종병원이었다. 화재 이틀 전 할머니 병문안을 갔던 곳이다. A 씨는 다급히 소방서에 들러 구급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응급환자들을 신속히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A 씨는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몸은 계속 현장과 병원을 오가면서도 머릿속에서 ‘여기 할머니가 있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 어떡하노’라는 걱정만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화재 당시 세종병원 현장에는 A 씨 고모부이자 숨진 강 씨의 사위인 정모 씨(56)도 있었다. 정 씨는 가족으로부터 ‘병원에 불이 났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자마자 자신이 운행하는 사다리차를 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난해 12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당시 사설 사다리차 업체 대표인 이양섭 씨(53)가 현장에서 사람을 구한 것이 기억나서다.

세종병원은 정 씨 집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현장에 도착한 정 씨는 창문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4층 환자들을 보고 병원 외벽에 사다리를 설치했다. 이를 타고 올라간 병원 직원들이 환자 10여 명을 구했다. A 씨 삼촌이자 숨진 강 씨의 셋째 아들도 화재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가 환자 여러 명을 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작 자신의 가족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밀양=조동주 djc@donga.com·안보겸 기자
#밀양참사#화재#세종병원#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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