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 이제부터 오후 6시면 사무실 불을 다 끌 겁니다. 일찍 퇴근하세요. 하하하!”
화장품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민기(가명·31) 씨는 지난해 ‘위풍당당’했던 사장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드디어 ‘저녁이 있는 삶’이 오는 걸까.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후 6시가 다가올수록 팀원 모두가 초조해졌다. 오후 5시 50분, 한 동료가 말했다. “팀장님, 보고 자료를 아직 다 만들지 못했는데 어떡하죠?” 팀장도 당황했다. 오후 6시, 불이 다 꺼지자 팀장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팀원들에게 알렸다. “모두 노트북 들고 회사 앞 카페로 모여라.”
한두 명씩 사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문 앞에서 사장님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배웅했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며 귓속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사장님, 직원 수를 두 배로 늘리면 모를까, 6시 퇴근은 불가능합니다. 업무 현실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요.’ 먼저 카페에 도착한 동료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
오후 7시 ‘카페 야근’에 한계가 왔다. 다른 손님 눈치가 보였고 집중도 안 됐다. 식당을 찾아 국밥을 먹은 뒤 ‘사무실 수복 작전’에 들어갔다. 선발대가 어두컴컴한 사무실로 향했다. 공포영화처럼 사장님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사무실 불은 다시 환하게 켜졌다. 웃프게도(웃기고 슬프게도) 우리가 들어온 뒤 2개 팀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결국 ‘일괄소등제’인지 뭔지는 두세 달 만에 흐지부지됐다. 오히려 그때 이후로 야근은 더 자연스러워지고 공고화된 느낌이다.
#2 대기업에 다니는 이현경(가명·29·여) 씨는 ‘워라밸’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사는 지난해 ‘오후 7시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며 PC오프제 도입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이 씨는 “지난주에도 나흘 야근했다”고 말했다. “컴퓨터가 꺼지는데 어떻게 야근을 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씨는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답답해했다.
이 회사에선 오후 7시에 컴퓨터가 바로 꺼지지 않는다. 오후 6시 55분에 ‘종료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라는 알림창이 뜬다. 오후 7시가 되면 화면이 꺼지지만 그렇다고 컴퓨터 자체가 꺼지는 건 아니어서 마우스를 움직이면 다시 화면이 켜진다.
더 황당한 건 알림창에 ‘연장 버튼’이 있다는 점이다. 이 버튼을 통해 연장근무를 원하는 시간을 입력할 수 있다. 어차피 컴퓨터가 꺼지는 것도 아니면서 알림창까지 뜨니 직원들의 ‘짜증지수’는 두 배로 치솟는다. 많은 동료들은 연장근무 시간을 ‘2018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으로 입력해 놓았다. 올해 안에 다신 알림창이 뜨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 씨는 “PC오프제가 퇴근시간이 아니라 야근 시작 시간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3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지선(가명·31·여) 씨는 지난해 말 회사의 ‘통 큰 약속’에 애사심이 싹텄다. 사장님은 “우리도 워라밸을 실천하자”며 전 직원 해외여행을 약속했다. 하지만 일정이 결정된 뒤 환호성은 수군거림으로 바뀌었다.
회사 단체행사인데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을 끼고 일정을 잡은 것이다. 직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주말에는 아이를 봐야 하는데….” “왜 휴일에 반강제로 단체여행을 가야 하나.” 여행지도 상대적으로 비용이 싼 일본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녀온 해외여행 직후 직원들은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가 해외여행 기간 중 평일인 목, 금요일을 사전 동의도 없이 일괄적으로 연차휴가로 처리한 것이다.
“사장님, 허울뿐인 워라밸은 사양합니다.”
▼ ‘묻지마 워라밸’ 공감 못얻고 역효과 불러… 업무별 효율성 높이는 법 찾아야 ▼
삼성, 롯데, 신세계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PC오프(OFF)제, 유연근무제 등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제도를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기업들이 워라밸을 내세운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 개인의 삶과 행복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퇴사율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많은 기업이 직원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6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7.7%(2016년 기준)에 달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 업무 방식으로는 인재 육성에 한계가 있어 변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보조 맞추기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조삼모사 식’ 도입이란 지적도 있다. 일생활균형재단 WLB연구소 안선영 연구원은 “올해 문재인 정부의 국정목표가 삶의 질 개선”이라며 “대기업은 정책 기조에 발맞추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세계 노조 관계자는 “업무량은 줄지 않았다”며 “근무시간만 줄여 급여를 낮추려는 시도 같다”고 주장했다.
기업문화나 노동시장이 변하지 않으면 워라밸 열풍이 사라질 수 있다. 포스코는 2014년 퇴근 소등제를 시행했지만 곧 폐지됐다. 업무 상황과 특성이 다른데도 일괄적으로 퇴근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란 사내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작정 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조직 내 구성원의 근무 행태, 회의, 의사결정 방식, 하루 일과를 점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스마트 리디자인(smart redesign)’을 통해 근로자는 워라밸이 되고, 회사는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정태영 부회장 “회식에 끌려가는 분들께…” ▼ 페이스북에 동아일보 시리즈 링크… 워라밸 기획, 포털 조회수 160만건
“오늘 저녁 어쩔 수 없이 회식에 끌려 나가는 모든 분께 이 글을 바칩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저녁도 회식‘(본보 2월 1일자 A8면)의 동아일보 기사 링크를 걸어 놓고 쓴 글이다. 정 부회장은 본보 기사를 소개하며 “직원들이 집에 들어가기 싫은 상사의 도우미도 아니고, 부서 단합이라면 1년에 몇 번이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팔로어 수만 10만 명에 이르는 정 부회장은 재계에서 혁신경영의 리더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현대카드는 지난해 초등학생 이하 자녀가 있는 임직원은 오전 7∼10시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도록 ‘출퇴근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본보가 지난달 30일에 시작한 연중 기획 시리즈 ‘워라밸을 찾아서’는 3회 만에 동아닷컴과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서 조회 수 160만 건에 이르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여러분의 ‘무너진 워라밸’을 제보해주세요. 설문 링크(bit.ly/balance2018)에 직접 접속하거나 직장인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블라인드’를 통해 사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시리즈 전체 기사는 동아닷컴(www.donga.com) 특별사이트 ‘2020 행복원정대: 워라밸을 찾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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