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이나 굶었더니…” 어느 쪽방촌의 ‘비극’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6일 20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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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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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 여관에서 생활하던 50대 일용직 근로자가 자신이 살던 객실에 불을 지르고 다른 투숙객을 칼로 찌른 뒤 자수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너무 오래 굶어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6일 서울 종암경찰서과 성북소방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3시 30분경 성북구 장위동의 한 여관에서 김모 씨(50)가 자신이 살던 약 6㎡ 크기의 방에서 이불에 불을 붙였다. 이어 여관 내 공동주방으로 향해 가스레인지에 연결된 가스 배관에도 불을 붙이려 했다. 건물 전체에 불을 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여관은 전체 66㎡ 크기의 1층 건물이다. 전형적인 ‘쪽방 여관’이다. 방마다 금세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른 객실에 묶던 원모 씨(62)가 복도로 뛰쳐나왔다. 불이 났다고 생각해 가스 밸브를 잠그러 부엌으로 갔다. 누군가 연기 속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김 씨였다. 원 씨는 오른쪽 옆구리와 목 뒤를 다쳤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고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4분 만에 꺼졌다.

김 씨는 곧바로 인근 지구대에 자수했다. 원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경찰은 김 씨를 현조건조물방화와 살인미수 혐의로 조사 중이다. 구속영장 신청을 검토 중이다.

경찰과 여관 투숙객 등에 따르면 김 씨는 이곳에서 ‘달방(월세)’를 얻어 생활하며 일용직 근로자로 일했다. 그러나 비수기인 겨울이 되면서 일을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 열흘이나 굶으면서 집에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관 투숙객들은 김 씨에 대해 “평소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라고 했다. 원 씨도 이날 김 씨를 처음 봤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고 가끔 행패를 부릴 때도 있지만 김 씨는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여관에서 생활하던 A 씨(60)는 “빨래할 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김 씨 때문에 큰소리가 난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피해자인 원 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입원 치료를 권유받았지만 그냥 퇴원했다. 상처 부위에 거즈만 붙인 채 쪽방 여관으로 돌아왔다. 치료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원 씨도 김 씨처럼 일용직 근로자다. 비수기인 탓에 김 씨와 마찬가지로 최근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 1월에는 거의 대부분을 쉬어야 했다. 사흘 전 운 좋게 공사장 일을 하나 얻은 게 전부였다. 한 달 만에 일을 나간 것이다.

원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김 씨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원 씨는 “경찰서에서 조사 받으러 들어오는 김 씨를 봤는데 기력이 없는지 비틀거리더라. 얼굴이라도 알고 지냈으면 일감이 있을 때 같이 가서 밥이라도 먹었을 텐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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