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헬기가 시민을 향해 기총사격을 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가 7일 밝혔다. 5·18특조위는 당시 공군 전투기의 무장출격 대기 사실도 확인했지만 광주 진압작전 계획으로 검토됐는지에 대한 결론은 유보했다. 5·18특조위는 이런 내용을 담은 조사 결과 보고서(220여 쪽)를 공개했다.
○ 황영시 등 계엄사 지휘부 헬기사격 명령
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40여 대의 군 헬기 중 일부 공격헬기(500MD)와 기동헬기(UH-1H)가 5월 21일과 27일 여러 차례 비무장 시민들에게 기총으로 위협·직접사격을 했다. 5·18특조위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예하부대(전투병과교육사령부)에 하달한 ‘헬기작전계획 실시 지침’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지침에는 ‘무장 폭도들에 대하여 핵심점을 사격 소탕하라’ ‘시위사격은 20미리 발칸, 실사격은 7.62미리가 적합’ ‘헬기사격 실시 전 3∼5차례 경고방송을 실시하라’ 등 구체적인 사격계획이 포함돼 있다. 조선대 뒤편 절개지에 코브라(AH-1J) 공격헬기의 벌컨포 위협사격을 목격한 관련자 증언도 헬기 사격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5·18특조위는 설명했다.
사격 명령권자도 확인됐다. 당시 황영시 계엄사 부사령관이 ‘전차와 무장헬기를 동원해 신속하고 강경하게 충정(진압)작전을 실시하라’고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구두로 명령했다는 것이다. 5·18특조위는 “황 부사령관은 5월 20∼26일 네 차례에 걸쳐 같은 명령을 했고, 코브라로 APC(장갑차량)를, 500MD로 차량을 공격하라는 취지의 명령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조사 과정에서 당시 헬기 조종사 5명은 무장 상태로 광주 상공을 비행했지만 기총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5·18특조위는 전했다.
○ 전투기의 폭격 진압 계획은 확인 안 돼
5·18특조위는 당시 공군 제10전투비행단과 제3훈련비행단 소속 전투기와 공격기의 무장 출격대기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10전비의 F-5전투기와 3전비의 A-37공격기들이 공대지 폭탄(MK-82)을 장착하고 모처로 출격대기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조치가 광주를 폭격하기 위한 것이란 명확한 근거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날 발표에 대해 윤장현 광주시장은 “신군부가 38년간 부인하던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대기 의혹에 대한 진상을 공식적으로 밝혀낸 국방부 특조위에 감사한다. 당시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자 암매장 등 미완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5·18특별법을 제정해 조사 결과를 국가보고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국회 청문회에 대응하고자 군이 비밀리에 만든 ‘511연구위원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7일 국방부 등에 따르면 서 차관은 1988년 5월 11일 발족한 ‘511연구위원회’에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5·18 관련 자료 중 군에 불리한 내용을 은폐·왜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국방연구원에 입사한 지 2년가량 된 서 차관은 이 위원회에서 발표문 작성 등에 참여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서 차관이 자의와 관계없이 위원회에 참가했던 것으로 위원회 활동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원회에 참가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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