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답정너 회의’…밤새 준비한 자료는 휴지통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9일 15시 14분


동아일보는 워라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웹뉴(웹툰·뉴스)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했다. 취재팀이 찾은 일과 삶의 붕괴 실태를 웹툰 작가들에게 보내 매회 관련 웹툰을 4컷짜리로 싣는다. 8회 ‘회의 끝, 일과(日課) 시작’ 웹툰은 ‘딸바보가 그렸어’로 유명한 김진형 작가가 계속되는 회의 탓에 퇴근시간이 지나서야 업무를 시작하는 공무원 최상우(가명·36)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그럼 A안으로 결정하고 추진합시다.”

이번 회의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로 끝났다. 이럴 거면 왜 자료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어제 야근하며 준비한 회의 자료를 클릭해 휴지통으로 보냈다. 매일 반복되는 ‘답정너’ 회의에선 어차피 쓸모없는 자료들이다.

10년 전 대한민국 정부의 사무관이 됐다. 모교 정문에 ‘최상우(가명·36)’ 석자가 적힌 행정고시 합격자 플래카드가 걸렸을 때 다짐했다. ‘혁신의 아이콘’이 되겠다고. 비효율의 상징인 공직 사회에도 ‘스마트 워커’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런 다짐은 반복되는 ‘답정너 회의’를 거치며 백기를 든 지 오래다.

우리 부서는 한 주에 세 번 회의를 한다. 월요일은 국장 주재 회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무조건 열린다. 수요일은 과장이 주재한다. 월요일 회의 결과를 점검하기 위해서지만 별다른 결과가 없어도 모인다. 특별히 논의할 게 없어 1시간 동안 시답잖은 농담만 하다 끝나기 일쑤다.

금요일 회의가 가장 난해하다. 월요일 국장 주재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다. 그야말로 회의를 위해 회의인 셈이다. 특히 장관이나 국장의 특별 지시가 떨어지면 회의를 위한 회의에 야근과 주말 근무가 덤으로 얹혀진다.

일주일에 세 번이면 참을 만하다. 문제는 ‘돌발 회의’가 더 많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와 각 부처 장관들이 모이는 회의 직전에는 그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가 시도 때도 없이 열린다. 높은 분들이 자주 모이면 그분들 대신 우리가 바빠진다. 고위급 회의가 끝나면 결과를 공유하는 회의가 또 소집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회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청사가 세종시로 옮긴 뒤 회의에 대한 생각은 더 ‘회의적’이 됐다. 세종시로 이사하지 않은 국장은 종종 서울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우리 부처에도 화상회의 시스템이 있지만 국장은 단 한 번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나? 샘솟는 건 짜증뿐임을 진정 모르시는지….

서울에서 회의를 하는 날엔 최소 4시간을 길에다 버려야 한다. 서울에서 칼퇴근을 한다 해도 집(세종)에 도착하면 한밤중이다. ‘시간 도둑’ 회의가 훔쳐간 건 그날 하루 저녁만이 아니다. 그날 하지 못한 업무로 다음날은 ‘자동 야근’이다.

도대체 회의가 뭔지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 회의는 ‘여럿이 모여 의논함. 또는 그런 모임’이라고 정의돼 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회의에서 ‘의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초임 사무관 때는 책상만 쳐다보다 나왔다. 지난주 회의는 시쳇말로 ‘멍 때리다’ 끝났다. 메모의 대부분은 낙서다.

회의를 ‘회지(會指)’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아는 회의는 ‘여럿이 모여 지시(指示)를 받는’ 거다. 정책 아이디어를 모아보자는 회의도 답은 늘 정해져 있다. 국장이나 과장의 생각이 그날의 정답이다.

지난주 회의 때도 국장은 의논 없이 각종 지시를 내려 꽂았다. 휴일을 반납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동기 카톡(카카오톡)방에 ‘오늘도 답정너 회의했다. 주말 출근 확정’이라고 올리자 ‘나도, XX’라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정부는 지난달 공무원의 초과근무를 40% 줄이고, 연가 사용을 100%까지 끌어올린다는 ‘근무혁신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우리 부처에도 지침이 내려왔지만 모두 코웃음을 쳤다. 회의 참석과 서울~세종 왕복으로 소비하는 시간만 일주일에 8시간 이상이다. 덕분에 매주 세 번 이상 야근을 해야 하고, 회의 준비를 위해 주말에도 하루는 꼭 청사로 출근한다.

정부의 지침대로 초과근무를 줄이려면 무엇을 줄여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누구든 그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스마트한 회의 만드는 방법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근무혁신 10대 제안 실천방안 매뉴얼’에 따르면 근로자 10명 가운데 7명은 불필요한 회의가 많다고 느끼고 있다.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막으려면 비생산적 보고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회의 목적과 소요시간을 명확히 하는 스마트한 회의 도입이 시급하다.

네이버는 지난해 회의실에 타이머를 설치하고 최소 인원만 회의에 참석하는 ‘스마트 미팅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후 10개월 뒤 회의가 8%가량 줄어들었고, 직원들의 회의 만족도는 64.8%로 캠페인 시행 전(58.1%)보다 높아졌다.

불명확한 업무지시와 기존 보고방식도 ‘업무혁신’의 대상이다. 고용부 매뉴얼에 따르면 근무시간 중 형식적이거나 비생산적 보고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 전체 근무시간의 31%에 이른다. 대면 보고를 최소화하고 전체 내용이 담긴 완벽한 보고서보다 키워드 중심의 간단 보고서로 보고 형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고서를 1, 2장으로 줄인 현대카드는 회의시간을 줄였을 뿐 아니라 인쇄용지와 잉크 절약 효과를 동시에 보고 있다. 지난해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신세계는 회의시간을 기존 2시간 이상에서 1시간 이내로 줄였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불필요한 회의가 줄어들면서 중요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중요도가 떨어지는 보고(결재) 단계를 최소화하고 현장 담당자에게 권한을 위임해 ‘선(先)조치 후(後)보고’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고용부 매뉴얼에 담겨 있다.

노동잡학사전 : 공휴일은 유급휴일 아니다?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설이나 3·1절 같은 공휴일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시행령)에 근거한 휴일이다. 근로기준법은 55조에 평균 1회 이상 유급휴일을 주도록 했을 뿐 공휴일 관련 조항은 따로 두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공휴일은 공무원만 쉬는 날인 셈이다. 다만 많은 기업들이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을 통해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하지 않은 소규모 사업장의 근로자는 무급으로 쉬거나 연차휴가를 써야만 공휴일에 쉴 수 있다. 이 때문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는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이 문제는 근로시간 단축 논의와 함께 다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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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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