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에서는 성추행 논란에 대해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현장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오랫동안 곪은 상처가 이제야 터졌다”는 것. 연기 및 기술 지도가 도제식으로 이뤄지는 데다 제작, 연출을 모두 극단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극단 대표인 연출가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는 구조가 문제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극은 극단 위주로 공연이 진행되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실상 극단 입단이 필수다. 배우 대부분은 별도의 소속사 없이 제작사인 극단에 소속돼 있다. 전통 있는 유명 극단일수록 캐스팅 권한을 100% 쥐고 있는 대표나 예술 감독의 위치는 ‘제왕’에 가깝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도 19일 “나도 이윤택 감독에게 안마를 한 적이 있다”며 “후배들이 고민을 토로할 때 못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라고 조언했지만 후배들은 ‘(일부 선배들과 달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는 합숙 방식으로 운영되는 폐쇄적인 구조여서 문제 제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감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 단원 김보리(가명) 씨도 17일 인터넷 게시판에 “(당시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최고의 연극집단 중 하나라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마치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각자에게 일어난 일과 목격한 일을 모른 체하며 지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김재엽 연출가도 본보와의 통화에서 “문제가 된 극단 대부분은 오랜 전통과 함께 연출가와 배우, 스태프의 관계가 일종의 사제지간을 넘어 군사부일체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불합리하고 반인권적 문제를 은폐하고 무시해 온 우리의 연극이 과연 정당한 연극이었는가 거듭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공연계의 ‘미투’ 움직임은 공연계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위드 유(with you)’ 연대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출가 이해성 김수정 송경화, 평론가 김태희, 배우 홍예원 등 연극인들은 21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10시에 서울 대학로의 한 연습실에서 정기모임을 열고 재발 방지 대책과 성폭행 피해자들의 법적 조력을 돕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진세 연출가는 페이스북에 “극단 내에 성평등 규약을 마련해 피해자는 보호하며 가해자와는 작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도 19일 온라인 창구인 ‘성고충 상담 및 신고’(가칭)를 설치해 문화계 성폭력 피해자뿐 아니라 목격자와 관리자도 제보할 수 있게 했다.
한편 고은 시인(85)이 상임고문으로 있는 한국작가회의는 문단 내 성추행 파문에도 19일까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시 ‘괴물’을 통해 고 시인의 성추행 논란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은 페이스북에 “때가 되면 제가 당했고, 목격했던 괴물의 성추행 당시 상황을 말할 생각”이라며 “1993년경 종로의 술집에서 목격한 괴물 선생의 최악의 추태는 따로 있는데, 제 입이 더러워질까봐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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