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칠 수 없는 ‘미투’… 이주여성들이 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7일 03시 00분


한국 식당-공장 취업한 외국인, 성희롱-성폭력 시달리기 일쑤
언어장벽과 해고 위협에 속울음… “우리도 같은 사람입니다” 분노

경기 화성에서 만난 성폭력 피해 태국인 여성 쏨(가명·오른쪽) 씨가 태국어로 ‘#MeToo(나도 당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왼쪽의 쁠라(가명) 씨도 ‘#MeToo’라고 적힌 종이를 들었다. 화성=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경기 화성에서 만난 성폭력 피해 태국인 여성 쏨(가명·오른쪽) 씨가 태국어로 ‘#MeToo(나도 당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왼쪽의 쁠라(가명) 씨도 ‘#MeToo’라고 적힌 종이를 들었다. 화성=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한국인 애인 갖고 싶지 않니? 나랑 같이 자자.”

30대 태국인 여성 쏨(가명) 씨는 지난해 겨울 충북 청주의 한 음식점에서 일을 시작한 첫날, 40대 남성 사장한테서 들은 말과 그의 능글거리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손님이 모두 나가고 다른 직원 2명도 자리를 비운 오후 10시경이었다. 사장이 ‘주방 일을 가르쳐 주겠다’며 손과 어깨를 주물럭거릴 때부터 어쩐지 이상했다. 쏨 씨는 서툰 한국어로 “싫어요”라고 분명하게 얘기한 뒤 식당 옆 컨테이너 숙소로 뛰어 올라갔다. 심장이 뛰었다. 2년 전 한국에 오기 전까지 태국에서 정규 대학 마케팅학과를 나와 번듯한 이벤트 기획사를 다녔던 그다.

‘식당 차릴 돈을 벌기 위해 택한 한국 생활이 이렇게 비참할 줄이야.’ 식당 화장실 벽엔 어른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무관이 끼어 있어 제대로 닫히지 않는 욕실 문도 이상했다. 사장을 피해 달아났던 컨테이너 숙소 문도 잠금장치가 없었다.

불안에 떨며 잠을 청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대로 사장이었다. “슬립 위드 미(나랑 잘래)?” “노(아뇨)!” 쏨 씨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장이 돌아가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려고 브로커에게 건넨 소개료와 교통비만 35만 원이다. 돈 생각을 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받지 못한 하루 일당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밤늦도록 고민하던 그는 자정 무렵 조용히 짐을 싼 뒤 태국인이 운영하는 콜택시를 불러 타고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

쏨 씨는 한국에 온 뒤 구한 일터마다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좌절했다. 2년 전 한국에 오자마자 취업한 경기 파주의 한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0대 남자 사장은 걸핏하면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일을 가르쳐 준다며 가까이 다가와 볼에다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모멸감을 느꼈지만 ‘이런 게 한국 문화인가’ 하고 참아 넘겼다. 하지만 사장의 추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함께 일하던 한국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 “하지 마”란 고성이 터져 나오는 걸 보고서야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음을 깨달았다. 한국말이 서툰 데다 공장을 나가면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은 쏨 씨 같은 이주 여성들은 사장의 집중 타깃이 됐다. 5일 경기 화성의 한 태국 사원에서 기자를 만난 쏨 씨는 입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없이 살지만 다 같은 사람이에요. 장난감이 아니라고요.” 언어와 문화 장벽, 고용주의 해고 위협 탓에 성추행 등 성폭력을 당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이주 여성이 간신히 외친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다.

화성=조은아 achim@donga.com / 위은지 기자
#미투#이주여성#성희롱#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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