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가빠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옆에 있던 아들이 “엄마, 왜 자꾸 한숨을 쉬어”라고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지수 씨는 지난달 26일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동참했다. 대상은 1997년 제자였던 자신을 성추행한 김석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67·연극연출가))다. 당시 30대였던 여 씨는 21년간 고통을 겪다가 겨우 용기를 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여 씨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소설 같다’ ‘글 실력 자랑하냐’ 등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셀 수없이 많았다.
여 씨의 폭로가 있던 날 김 전 교수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 씨의 답답한 심경은 풀리지 않았다. “사죄와 용서를 구한다”는 김 전 교수의 사과문에서 여 씨는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 악성 댓글까지 이어지면서 상처가 더욱 깊어졌다. 해결책이 절실해진 여 씨는 그동안 하지 않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시작하기로 했다. 여 씨는 “SNS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며 소통하려고 한다. 더 이상 그늘 속에 숨으면 안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여 씨처럼 미투 당사자들은 폭로 후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렵게 털어놓은 내용을 거짓이나 과장된 것이라고 폄훼하는 댓글 탓이다. 또 피해자의 신상을 둘러싼 정체불명의 괴담이 돌기도 한다. 천주교 수원교구 한모 신부의 성폭행 시도를 폭로한 김민경 씨도 “한 신부의 사과를 7년 동안 안 받아줬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다. 배우 조재현 씨(53)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최율 씨(배우)는 SNS에 처음 올린 글을 삭제했다. 그는 얼마 뒤 SNS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죽인다고 하는데 안 무서운 사람이 있나. 그래서 글을 지웠다”고 밝혔다.
모델 A 씨(23·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와 일할 때 반드시 사진찍고 녹음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5일 “사진작가가 반나체 의상을 강요하고 촬영했다”는 글을 올렸다. 당시 A 씨는 “무리한 의상”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혼자 속을 태우고 있다. A 씨는 “폭로 글을 5차례나 쓰고 다시 썼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도리어 거짓말쟁이로 몰렸다”고 털어놨다.
피해 여성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미투가 마치 유행처럼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는 것이다. 각계에서 용기 있는 폭로가 이어져야 사법처리 가능성이 높아지고 구조적인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해서다. 사진작가 배병우 씨(68)의 성추행을 폭로한 B 씨(29·여)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미투 관련 뉴스를 검색한다. 새로운 폭로가 나오면 주변 사람에게 기사를 보내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B 씨는 “행동해야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미투가 남녀 간 ‘편 가르기’로 전락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를 위해 나쁜 의도에 의한 거짓 폭로 가능성을 경계했다. 전체 미투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 씨는 “미투에 참여한 뒤 동기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그들도 피해를 봤지만 처지가 있어 말을 못하고 있다. 숨죽여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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