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50대 A부장과 밀레니얼 세대 B대리. 회식을 놓고 벌이는 두 사람의 가상 설전을 소개한다.
A: “젊은 직원들은 일만 하고 퇴근하는 걸 생산성 제고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 소통하고 친밀해져야 서로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죠.”
B: “회사가 무슨 동아리인가요? 꼭 친해져야 하는 이유가 뭔지……. 평소에 일할 때 말이 안 통하는 게 문제죠.”
A: “회의 시간에 그렇게 말해보라고 해도 조용하지 않았나. 술 마시면 그래도 좀 말하기 편하잖아요.”
B: “…. 회식 때도 부장님 혼자 얘기하시던데요. 설마 몇 시간 훈시하시고선, 소통했다고 착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술을 둘러싼 세대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나친 회식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해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래서 기업들은 2010년대 이후부터 회식문화 근절 캠페인 실험을 해왔다. 지나친 과음이 업무효율을 떨어뜨리고 피로를 높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2010년 경은 기업에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가 물밀 듯이 입사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웬만한 기업마다 하루 일찍 퇴근하게 해주는 ‘가정의 날’을 만들고 회식은 1차 까지만 마시자는 캠페인을 벌여 왔다. 삼성전자나 LG디스플레이는 ‘112(한 가지 술로, 1차에서, 2시간 이내에)’처럼 구체적인 가이드도 발표했다. 119(한 가지 술로, 1차에서 9시 이전까지)캠페인에도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캠페인 효과는 어땠을까. 지난달 본보가 대한상의와 대·중소기업 336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회사는 회식을 자주 한다’에 대한 긍정 응답율은 25%, 보통은 39.0%, 부정이 36.0%에 달했다. 많은 기업들이 회식을 잦게 느끼지 않았다는 의미다.
공공기업 차장급인 김모 씨(37·여)는 “처음 회사에서 119 캠페인을 할 때 저게 뭐냐고 웃었는데, 부서장끼리 서로 캠페인 잘 지키기 경쟁에 나서면서 진짜로 회식이 줄었다. 10년 전에 2차 노래방이 기본이었다가 요즘엔 2차도 안가고 가더라도 커피숍에 갈 때도 있다”고 전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중시되는 최근에는 좀더 강제적인 조치들도 나온다. LG유플러스는 올해부터 월수금 회식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노래방에서는 이 회사의 법인카드가 긁어지지 않는다. 강제 조치가 효과는 있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월수금 회식을 금지했는데 이날 법인카드를 긁으면 나중에 조사 나올 수도 있다 보고 다들 조심한다. 요즘은 점심에도 회식 하고, 영화관람으로 대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술이 빠지니 조직 내 세대간 소통방법을 모르겠다는 호소가 곳곳에서 나온다는 점. 회식이 줄어든 기업의 한 임원은 “젊은 세대와 우리(40~50대)가 생각하는 ‘스킨십’ ‘소통’ 방식이 다른 것 같다. 솔직히 영화보고 차 마시고는 우리 스타일 아니다. 어색하고 친해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은 “평소에도 말 안하고 회식도 싫어하는 사원들 보면 진짜 교류 자체가 싫은 건가 싶기도 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조직 간부들 말처럼 친해지는 게 일하는데 도움이 되긴 할까.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조직문화 전문가 정은지 이머징 리더십 인터벤션츠 대표는 “경영환경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려면 조직원들의 심리적인 안정감이 더 중요하다. 조직원 간 연대가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조직원 간 연대와 술자리에서의 끈끈함이 같다고 착각하는 것은 문제다. 업무에 대한 공평한 칭찬 격려가 친밀성을 높일 수 있다. 회식은 다소 위계질서와 고 조직 충성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 쉽다”고 말했다.
아예 업무 시간내에 ‘술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세대간 갈등을 피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 기업에서 일하는 이모 씨(37·여)는 “부서에서 오후 4시에 스탠딩 와인 모임을 열기도 한다. 한국식 끈끈함이 그리울 때도 있긴 하지만 퇴근 후 스케줄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은 배울 만 하다” 고 말했다.
‘술 없어도 친해지기’의 대안으로 등장한 제도 중 하나는 ‘호칭 파괴’다. 부장님, 과장님 대신 ‘영수님’이나 ‘김 프로’ 등으로 통일해 수평적으로 소통해 보자는 것이다. 2002년 CJ그룹을 시작으로 지난해 삼성전자, 올해 LG유플러스, SK텔레콤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이 호칭 통일에 동참하는 추세다. 카카오는 설립 초기부터 ‘영어 호칭’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창업자인 김범수 의장을 ‘브라이언(Brian)~’하고 부르는 식이다.
이 또한 반론도 있다. 님 호칭이 이미 정착한 회사에 경력으로 입사한 한 과장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자꾸 이름을 부르다 보면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위계질서는 여전히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호칭 파괴를 도입했다가 포기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호칭만 바꾼다고 회사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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