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상업고 졸업생들에게 은행은 단연 인기 직장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이미지에다 월급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업점 맨 앞줄에 앉아 입출금 업무를 보는 텔러직에는 명문 여자 상업고 우등생들이 몰렸다. 은행 텔러의 1차 수난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고졸 인력은 가장 먼저 ‘가지치기’ 당했고, 이어진 취업난에 대졸자에게 밀려났다. 요즘 은행 텔러는 2차 수난을 겪고 있다.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을 통한 금융 거래가 크게 늘면서 지난해까지 6년간 은행 점포 1600여 개가 문을 닫았다.
한국고용정보원은 ‘4차 산업혁명 미래 일자리 전망’ 보고서에서 앞으로 사라질 직업 6개를 꼽았다. 은행 텔러, 진단 의사, 콜센터 직원, 계산원, 생산·제조 단순 종사원, 창고 작업원 등이다. ‘위기 직업’의 특징은 자동화나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에 드는 경비가 인건비보다 싸다는 점이다. 또 AI가 사람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업무라면 멸종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로봇이나 AI보다 더 싸게, 더 뛰어나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만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변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삼성서울병원은 2015년 의약품 조제(약을 지음) 로봇을 도입했다. 이 로봇은 조제가 까다로운 항암제 파트에서 하루 6시간 일하며 평균 200여 건의 처방전을 소화한다. 로펌 대륙아주는 최근 ‘AI 변호사’를 채용했다. 맡은 사건의 판례나 법률을 분석하는 데 초보 변호사들이 사나흘 걸렸던 분석 업무를 몇 분이면 끝낼 수 있다. 전문직도 기술 진보에 따른 변화에서 예외가 아닌 셈이다.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떠올릴 것만은 아니다. 사라지는 직업이 있다면 새로 등장하는 직업도 있다. 고용정보원도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가상현실, 3D(입체) 프린팅, 드론(무인기), 정보보호 전문가 등을 뜨는 직업으로 꼽았다. 시대 변화에 맞춰 진로 교육도 바뀌어야 한다. 부모들이 10, 20년 뒤 직업을 가질 아이들에게 현재의 눈높이에 따른 꿈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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