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은 이미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미국이 화답했고, 지난해까지 O월 위기설이 나돌던 한반도가 지금은 딱 요즘 날씨처럼 온화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대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육지의 따뜻한 분위기가 얼어붙은 1만m 상공까지 녹여줄 수 있을까. 북한 공역도 다시 열릴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입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냉전은 끝났지만 북한의 영공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7년이 더 흐른 뒤였습니다. 1998년 3월 3일 오전 8시 57분, 남한 민항기는 북한 관제사와 역사적인 첫 교신에 성공합니다.
“여러분의 우리 관제지역 통과를 환영합니다. 평양 날씨는 미누스(영하) 1도로 맑고 좋습니다.”
앵커리지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258편 보잉 747-400 화물기가 평양 비행정보구역(FIR)에 접근했음을 보고하자 평양 관제사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민간 항공기의 관제 공용어는 물론 영어지만, 자국을 비행하는 자국 항공기는 편의상 모국어로 교신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중국 영공에서 중국 비행기는 아예 처음부터 중국어로 교신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20분 간 300km를 비행한 대한항공 258편은 오전 9시 17분 동해상공에서 독도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영공(당시 대구 비행정보구역)으로 넘어오며 평양 FIR을 빠져나옵니다. 북한 관제사는 우리 비행사를 환송하며 “다음에 계속 만납시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그 후로 약 10여 년 간 평화롭게 열려 있던 북한 공역은 2009년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으면서 다시 차가워집니다. 북한은 2009년 3월 5일 “군사 연습 기간동안 우리(북한)측 영공과 그 주변, 특히 우리의 동해상 영공 주변을 통과하는 남조선 민용 항공기의 항공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북한이 언급한 ‘군사 연습’은 이 해 3월 9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된 ‘키 리졸브’ 합동군사훈련입니다.
국적항공사들은 북한 항로를 피해 운항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영공 비행이 완전 금지된 건 아니었습니다. 항공사들이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하지만 다음해 북한 공역은 완전히 자물쇠가 걸리게 됩니다. 도화선이 된 일이 발생한 일시는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45분, 장소는 백령도 서남쪽 1.8km 해상. 네. 우리 해군 초계함이 서해상에서 북한 공격을 받은 ‘천안함 침격 사건’입니다.
천안함 침격 사건 이후 우리 정부는 5·24 대북제재 조치를 발표합니다. 이 날 이후 우리 국적 항공기는 북한 공역을 통과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상 항공자유화협정의 가장 기본적 단계인 제1자유(두 국가가 협약을 맺고 서로 자국 항공기에 상대국 영공을 무기착 비행할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를 제한한 겁니다. 우리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5·24 조치가 항공자유화협정 파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사실상 그에 준하는 조치인 셈입니다.
5·24 조치는 남한이 북한에 발표한 제재이기 때문에 외국 비행기가 북한 영공을 이용하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김정은 현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1년에도 수차례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하면서 북한 공역 인근은 전 세계에 ‘위험한 영공’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주발사체를 발사하는 국가에서는 전 세계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우리나라 영공 어느어느 구역에서 비행하지 말라’는 공지를 발표합니다. 우리나라도 나로호를 발사할 때 이 같은 발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ICBM 기술은 예상보다 많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재진입 기술과 목표지를 정확히 타격하는 기술은 미지수입니다. 즉, 낙하 지점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우리나라 영공을 비행하던 몇몇 조종사에게 육안으로 관측되는 일마저 벌어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선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동해상으로 뻥뻥 미사일을 쏴 대는 북한을 바라보던 미국은 미연방항공청(FAA) 발표로 북한 동해 영공과 일본 홋카이도(北海島) 서쪽 해역 일부를 위험지역으로 선포해버립니다. 미국 항공기에게 되도록 이 곳을 지나가지 말라고 권고한 겁니다. 예전 ‘날飛’에서 한 번 언급해드린 적이 있지만, FAA의 권고는 사실상 전 세계 항공사와 항공 관련 기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파급력이 있습니다.
이어 12월에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도 북한 영공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할 것을 논의 중이라는 보도마저 나옵니다. 후속 보도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조치는 아직 실제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조치가 실제로 발표됐다면, ICAO 회원국의 모든 항공기는 북한 영공에 들어갈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현재 북한 영공을 비행하는 비행기는 있는 걸까요. 물론 △고려항공은 빼고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고위급 회담이나 마식령스키장 훈련을 위해 비행했던 것 같은 ‘임시편’ 비행기는 제외한 순수 정규편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러시아 항공이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인천공항을 오가는 S7항공과 오로라항공 등이 북한 영공을 깊숙이 가로질러 우리나라 동해상으로 건너옵니다. 그 외에는 사실상… 없습니다.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과 평양 순안 국제공항을 오가는 항공편이 현재 고려항공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북쪽 중국령인 만주 지역 등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비행기나, 우리 영공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는 어떨까요? 셴양 타오셴 국제공항에서 일본 오사카 국제공항으로 가는 중국남방항공 611편의 경로를 한 번 볼까요.
보시는 것처럼 북한 영공을 피해 중국에서 남한 영공으로 진입한 후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셴양에서 오사카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북한 내륙 영공을 통과한 후 동해를 거쳐 오사카로 가는 항로지만 일부러 돌아가고 있습니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나라인 중국 비행기조차도 북한 영공을 이용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우리 국적기는 말 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북한 영공은 꼭 열려야 하는 걸까요. 그대로 둬도 우리 국적기는 갈 곳 다 가는데 굳이 열려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유는 다름 아닌 ‘돈’ 때문입니다. 인천과 미국을 오가는 우리 국적기의 경우 인천 출발편은 통상 인천-일본-알류산열도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갑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경우 뉴욕 등 미국 동부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아예 러시아-중국 만주 지방을 거쳐 서해로 인천공항에 진입합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가장 짧은 경로는 북한 동해상을 가로질러 가는 경로입니다. 그 외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대한항공·제주항공의 경우 북한 영공만 열린다면 비행 시간을 40분 이상 단축할 수 있고, 사할린을 오가는 아시아나 항공편도 미세하나마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심재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북한 영공 폐쇄로 우리 국적기들이 보는 손해액을 집계하기도 했습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연간 90억 원, 아시아나항공이 매년 32억 원씩 돈이 더 들어갔다는 내용입니다.
비행기가 영공을 통과할 때는 그냥 통과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통행세’를 냅니다. 북한 영공을 통과하는 비행기는 평양 관제소에서 관제 서비스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항공기들이 북한 영공을 이용하던 때 대한항공은 이 북한 영공 이용료로 1년에 약 20억 원, 아시아나항공은 7억 원 정도를 지불해 왔습니다. 여기에 일부 외국 항공사가 내는 돈까지 합쳐 북한은 연간 약 30억 원에 해당하는 외화를 벌었습니다. 이념이나 정치 등을 배제하고 오로지 경제적 득실만으로 따질 때 북한 영공 개방은 남북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조치인 셈입니다.
올림픽을 전후해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남한 대북특별사절단은 서해 직항로로, 마식령스키장에 공동 훈련을 하러 갔던 우리나라 선수단은 동해 직항로로 남북을 오갔습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벌써부터 기대하는 건 섣부른 판단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일 수 있다면, 남북 모두에게 ‘윈윈’인 북한 영공 개방도 함께 이뤄지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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