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으로 거듭나는 제주]‘그날의 비극’ 화해와 상생으로 이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제주4·3사건 70주년을 계기로 비극을 넘어 화해와 상생, 인권과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각계각층이 힘을 모으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4·3사건 70주년을 계기로 비극을 넘어 화해와 상생, 인권과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각계각층이 힘을 모으고 있다. 제주도 제공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작은 화산체)에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 신호탄이 올랐다. 무장대원 350여 명은 제주지역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삼양, 함덕, 세화, 화북, 남원, 대정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도 습격했다. 무장대의 손에는 소총, 사제폭탄, 칼, 죽창 등이 들렸다. 이날 습격으로 경찰관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한국현대사 비극인 ‘제주4·3사건’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선)·단독정부(단정) 반대,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제주4·3사건이 발발한 직후 난리를 피해 중산간 지역으로 대피한 당시 주민 모습.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제주4·3사건이 발발한 직후 난리를 피해 중산간 지역으로 대피한 당시 주민 모습. 제주4·3평화재단 제공
○ 4·3이 머우꽈(무엇입니까를 뜻하는 제주어)

4·3사건의 배경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포함하고 있어서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이 도화선이라는 데는 대부분 의견을 같이한다. 이날 경찰이 과잉대응을 하면서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해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제주지역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전체 직장의 90%가 참여할 정도로 유례없는 민관합동 파업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 등은 제주에 서북청년회, 응원경찰 등을 파견했는데 문제 해결보다는 횡포와 만행 등으로 지역주민과 갈등이 심해졌다.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지역 민심도 4·3사건이 확대된 배경이다. 5·10 총선거에서 제주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접전 사태는 한동안 소강 국면을 맞았다가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4·3사건은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1948년 10월 제주 토벌군으로 파견하려던 군 병력이 반기를 든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안선에서 (한라산 방면으로) 5km 이외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무차별 학살’의 광기(狂氣)로 접어들었다.

이 포고문은 ‘초토화 작전’이나 다름없었다. 중산간(해발 200∼600m) 마을 95% 이상이 불탔고 주민 2만여 명이 생활 터전을 잃어 산속으로 들어가는 원인이 됐다. 이때부터 이듬해 3월까지 4·3사건 희생자 80%가 발생했다. 한 마을 주민 400여 명이 집단으로 총살된 ‘북촌사건’이 발생하는 등 곳곳에서 총성이 무차별적으로 터졌다. 6·25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을 지원할 우려가 있는 사람을 사전에 격리하는 ‘예비검속’ 명목으로 또다시 무고한 주민이 희생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2003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발간 당시 접수된 희생자는 1만4028명으로 가해자별로는 토벌대 78.1%, 무장대 12.6%이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압도적이다. 진상보고서는 미확인 희생자 등을 감안하면 실제 인명피해를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10월 현재 정부 심의로 확정된 희생자는 사망 1만244명, 행방불명 3576명, 후유장애 164명, 수형자 248명 등 1만4232명이다. 최근 사망 36명, 행불 14명, 후유장애 5명, 수형인 9명이 추가 접수돼 심의를 받을 예정이다.

○ 완전 해결을 향해

5·16군사정변 이후 4·3사건은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 단어였다. 연좌제 등에 따른 유무형 피해가 상당했다. 일부 유족은 공직 진출이나 해외여행을 할 수 없고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폭도 집안’이라는 누명을 썼다. 한 마을에 가해자, 피해자가 함께 살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암흑의 시기를 지나 1987년 시민항쟁 이후 띄엄띄엄 논의되던 4·3사건은 1989년 재야·시민단체 등이 ‘제1회 4·3추모제’를 열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78년 4·3사건 비극을 알린 현기영 소설 ‘순이 삼촌’을 비롯해 문학, 연극, 미술 등에서도 진실을 알리는 작업이 진행됐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4·3사건은 6·25전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부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했으며 2000년 ‘제주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4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지적이 많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2월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아픈 역사의 청산과 치유를 목표로 10대 요구 사항 및 과제를 내걸었다. 정부 차원의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와 유족 배·보상, 불법재판 수형인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유적지 보존관리, 행방불명인 유해 발굴,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미국 책임 규명 등이다. 오영훈 의원(제주 제주을·더불어민주당) 등은 희생자와 유족의 보상규정, 4·3 군사재판 무효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주4·3사건 특별법 개정안을 지난해 12월 발의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진영에서 바라보는 ‘공산폭동’ 시각 등 이념적 공세도 넘어서야 할 부분이다.

제주도는 ‘4·3 70주년 제주방문의 해’로 선포하고 4·3사건의 아픔과 비극을 화해와 상생, 평화, 인권의 가치로 승화하는 토대를 쌓고 있다. 올해 국비와 지방비 등 147억 원을 투입해 추모·위령, 문화예술, 학술, 교류협력, 세대 전승 등 5개 분야에서 117개 사업을 펼친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4·3사건 관련 일지


○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 시위 후 경찰 발포로 6명 사망, 8명 중경상
○ 1947년 3월 10일 3·1절 발포 책임자 처벌 요구하는 166개 기관단체 총파업
○ 1947년 11월 2일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
○ 1948년 4월 3일 무장대 봉기 시작
○ 1948년 10월 17일 해안에서 5km 벗어난 지역 통행금지를 명령하는 포고령
○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 해제
○ 1949년 1월 17일 토벌대에 의한 ‘북촌사건’ 발생. 주민 400여 명 학살
○ 1949년 6월 7일 무장대(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사살
○ 1949년 10월 2일 제주공항 인근에서 249명에 대한 총살 집행 후 암매장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
○ 1989년 4월 3일 제1회 4·3추모제
○ 1991년 4월 3일 제46주년 제주도 4·3사건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
○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공포
○ 2003년 10월 15일 정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 국가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사과
○ 2005년 1월 27일 제주 평화의 섬 선포
○ 2006년 4월 3일 노무현 대통령, 제58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위령제 참석
○ 2008년 11월 10일 제주4·3평화재단 출범
○ 2014년 3월 24일 제주4·3사건 국가기념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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