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 손에 자라신 분들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올해 31세인 전 네 살 때부터 14세 때까지 10년을 대구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엄마였습니다. 수저통을 두고 학교에 간 저를 위해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교문 앞까지 달려오시던 모습, 외할머니표 간식인 조청 찍은 찐 떡을 제 입에 넣어주시며 환히 웃으시던 모습…. 제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엔 늘 외할머니가 계십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여자친구에게 전화할 카드를 조금씩 아껴 매주 할머니께 전화했죠. 엄마보다 외할머니가 더 애틋한 존재였으니까요.
지난해 취업 삼수 끝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을 때 외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아이고 우리 민석이, 맘고생 많았지!” 전 외할머니께 효도할 수 있게 해준 회사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마음이 한순간에 푹 내려앉더군요. 회사가 ‘외조부모상은 상으로 치지 않는다’며 상조휴가를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친조부모상에는 유급휴가 3일에 화환과 장례용품, 상조 인력과 조의금이 지원되지만 외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친가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장례에조차 유급휴가가 나온다던데 외조부모 장례는 가볼 수조차 없다니 대체 말이 되나요.
전 간신히 이틀의 연차를 내 장례식장에 갔지만, 셋째 날 업무 때문에 복귀하란 연락을 받고 발인도 보지 못한 채 출근해야 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현실과 동떨어진 상조정책
어린이집 등원 시간인 오전 8, 9시 무렵 전국의 주택가 인근 거리에는 직장에 간 엄마를 대신해 손자 손녀의 유모차를 미는 ‘할마’ ‘할빠’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에 따르면 매일 아침 손주의 유모차를 미는 전국의 할마 할빠 셋 중 둘이 ‘외조부모’다. ‘친정으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시댁보다 두 배나 많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5세 꼬마 영훈이에게도 ‘할머니’는 외할머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내내 영훈이를 키워준 사람이 외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친할머니는? 그냥 ‘분당 할머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사는 ‘그냥’ 할머니.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직장맘 윤지영(가명·39) 씨네 집도 마찬가지다. 윤 씨는 “아이를 낳고 시댁에 육아 도움을 요청했더니 ‘육아는 네 몫이니 친정 부모에게 여쭤봐라’라고 말하더라”며 “시부모님이 늘 ‘우리 새끼 승준이(가명)’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상 승준이를 지금까지 키운 건 친정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외가를 더 가까운 가족으로 느끼는 한국 사회의 문화가 생긴 지 오래지만 기업들의 상조 정책은 여전히 친가 위주를 못 벗어나고 있다.
동아일보가 국내 10대 그룹의 상조 지원 현황을 알아본 결과 이 중 6곳이 휴가일수, 조의금, 지원 물품 등에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친조부모상에는 5일의 상조휴가와 장례용품을 지원했지만 외조부모상에는 2일의 휴가만 지원했다. SK이노베이션과 GS는 친조부모상에 3일의 휴가와 조의금을 지급하는 반면, 외조부모상에는 딱 하루의 휴가만 줬다. LG화학과 롯데제과는 친조부모상에 상조휴가 3일, 조의금, 장례용품을 지급하면서도 외조부모상에는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다.
조사 범위를 넓혀도 상황은 비슷했다. 국내 100여 개 대·중견기업의 상조 지원 대행업체 A사에 따르면 고객사인 사업장 1005곳 중 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을 ‘차별 없이’ 모두 지원하는 곳은 10%도 안 된다. “친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구분 없이 공평하게 지원하는데 유독 외가 쪽을 지원할 때는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다시 구분해서 차별을 두는 기업도 있어요. 외조부상은 지원해도 외조모상은 지원하지 않는 거죠. 요즘 사람들 마음속에는 외할머니가 최고인데 기업 상조 지원에서는 외할머니가 맨 꼴찌예요.”
이유가 뭘까. B사 인사팀 관계자는 “외손주는 상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차등을 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조차 “요즘같이 비혼자가 많고 자녀가 한둘인 시대에는 외손주가 상주가 되는 경우도 많다. 고칠 필요가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건 친족 제도의 잔재를 그대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라며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된 만큼 기업들의 문화적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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