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대학 총장은 박춘란 교육부 차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박 차관은 “수시 비중이 급격히 높아져 우려스럽다”며 우회적으로 정시 모집인원 확대의 뜻을 전해왔다. 그즈음 다른 두 곳의 대학도 박 차관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미 대입전형계획을 제출했던 대학들은 진의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박춘란 미스터리’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교육부가 10년간 장려해온 수시 확대에 급제동을 걸었다. 그것도 문서 한 장 없이 구두로 전달하는 비정상적인 방식이었다. 교육정책을 둘러싼 교육부와 청와대의 갈등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 갑자기 ‘정시 확대 깜빡이’ 켜져
교육부의 정시 확대 요청은 예고없이 이뤄졌다. 지난달 21∼23일 박 차관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대학입학처장협의회가 열렸다. 이때 수시·정시 비율에 대한 우려는 전달되지 않았다. A대학 입학처장은 “인력, 비용 문제로 수시 인원을 더 늘릴 수 없어 오히려 교육부에 혼날까 봐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갑작스러운 정시 확대 요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일 이진석 고등교육정책실장은 “구두로라도 우려를 전달하게 된 배경은 급격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시·정시 비율이 차이 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설명과는 엇갈린다. 이미 준비해왔던 사안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와 교육부는 이미 1월 2020학년도 대입부터 수시 비중을 늘리지 않는 쪽으로 협의를 마쳤다는 게 청와대 측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아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발표 예정인 2022학년도 대입 정책 개편은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가, 2020학년도 전형은 교육부가 맡는 쪽으로 교통정리가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교육부가 언론 브리핑 등을 통해 2020학년도 대입 정책 방향을 설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런 과정 없이 3월 말이 임박해서야 주요 대학에 전화로 정시 확대를 요청하니 졸속으로 비친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여권 관계자 역시 “줄곧 정시 확대 여론을 전달했는데도 교육부가 꿈쩍하지 않다가 이렇게 거친 방식으로 처리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 교육부가 뒤늦게 전화한 이유는
이미 청와대와 교감이 이뤄졌는데도 교육부는 왜 대입전형계획 제출 마감이 임박해서야 정시 확대를 요청했을까. 청와대와 여당 일각에서는 교육부가 갑작스러운 정책 전환이 내키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전임 정부는 지속적으로 수시 확대를 추진해 왔고, 수시를 늘리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줘 왔다”며 “이 역할을 맡았던 교육부가 수시 축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대학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논란을 의식해 뒷짐을 지고 있다가 실기(失期)했을 가능성도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예년같이 수시·정시가 7 대 3 비율이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안을 마련했는데 주요 대학들이 제출한 대입전형계획을 보니 8 대 2 수준이었다”며 “급한 불을 꺼야 했다”고 말했다. 수시 비중이 높은 서울 주요 대학에만 전화를 한 이유가 설명된다.
○ 지방선거 앞두고 당정청 충돌
대학별 대입전형은 이달 말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6월 지방선거가 한 달 남은 시점이다. 수시 비중이 한 해 10% 이상 뛴다면 민심 이반이 우려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청와대 개입설과 여당 압력설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한 교육부 관계자는 “시간이 흐르면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박춘란 미스터리’를 계기로 교육을 둘러싼 당정청의 누적된 난기류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새다. 한 여당 의원은 “김상곤 부총리 취임 이후 교육 정책의 혼선에 여당 의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며 “당정 협의를 해도 교육부가 여당의 의견을 잘 수렴하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청와대 내에서도 “교육 정책 결정 라인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교육 정책은 휘발성이 높고, 국민의 관심도 큰 만큼 혼선을 더 방치했다가는 정권 차원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높아서다. 다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사청문회 리스크를 감수하기 어려워 쉽사리 ‘김상곤 카드’를 바꾸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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