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성범죄 재판, 남성중심 시각서 벗어나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4일 03시 00분


성희롱 교수 복직 판결 파기환송
“性인지 감수성 부족… 피해자 고려”
여성변회 “양성평등 기준점 제시”

여학생을 성희롱했다가 해임된 대학교수가 낸 해임 결정 취소 소송에서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에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남성 중심의 오래된 고정관념이나 문화에서 탈피해 올바른 성 관념을 갖추는 것을 뜻한다. 대법원이 성범죄 소송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판단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열풍에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로 답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대학교수 A 씨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해임 결정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A 씨는 2013∼2014년 수업을 하다 여학생을 뒤에서 안고, 학과 엠티(MT)를 가서 자고 있는 여학생 볼에 입을 맞추는 등 성희롱 14건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2015년 4월 해당 대학에서 해임됐다. 대학 측은 A 씨가 학생들에게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써주겠다” “남자친구와 왜 사귀냐. 나랑 사귀자”라고 말했고, 수업 중 질문한 여학생을 뒤에서 안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답을 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1심 재판부는 A 씨 행동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 대학의 해임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행위는 아니라는 이유로 해임이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A 씨가 평소 학생들에게 자주 농담하거나 가족 이야기, 연애 상담을 하는 등 격의 없이 지냈고, 피해자가 성희롱이 벌어진 이후에도 A 씨 수업을 계속 수강한 점 등을 감안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리적 오류를 지적하기에 앞서 항소심의 판단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어 “피해자들이 성적 굴욕감을 느낄 수 없다고 본 점은 수긍할 수 없다”며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학생 취업에 중요한 추천서 작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뤄진 점, 성희롱 행위가 일회적이지 않고 계속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해자는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며 “‘2차 피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성변호사협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대법원 판결은 향후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의 심리와 판단이 남성 중심의 성(性)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판단돼야 한다는 획기적인 기준점을 제시했다”며 환영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성범죄#재판#미투#성인지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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