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서 탈출한 뒤 응급구조사가 되기로 결심해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에 재학 중인
장애진 씨가 빈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다. 장 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이 돌아오면 떠나보낸 친구들과의 추억이 더 자주
떠오른다”고 말했다.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쿵’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었다. 컴컴한 물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배 안엔 단원고 친구들이 아니라 엄마가 있었다. 그 순간 A 씨(21·여)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깼다. 꿈이라며 스스로를 도닥였지만 질식할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생존자 A 씨는 지난해부터 이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참사 직후엔 없었던 증상이다. ● 시간 지날수록 봄이 두려운 세월호 생존자들
이소희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장과 김은지 마음토닥정신건강의원장(전 단원고 스쿨닥터)은 단원고 출신 세월호 생존자 75명 중 46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을 추적한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없던 증상을 호소하는 등 상태가 악화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15일 밝혔다.
조사 결과 PTSD 증상이 심각해 집중 치료가 필요한 생존자는 같은 기간 2016년 7월 6.5%에서 올해 1월 17.4%로 증가했다. 이소희 과장은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가면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의 절반가량은 사건 후 3년이 지나면 증상이 상당히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반대다. 오히려 일정 시기가 지난 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의 경우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나 책임자의 태도 등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PTSD를 뒤늦게 악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그날’의 기억
세월호 생존자 B 씨(21·여)는 건물 안에 있다가 바닥이 기울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밖으로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항공기나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도 괴로워 집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처럼 일상생활 중 갑자기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침습(侵襲)’은 PTSD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사람을 구하고 싶어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고 있는 장애진 씨(21·여·동남보건대 응급구조과)는 병원 실습 중 심정지 환자의 모습을 본 순간 손이 떨리고 몸이 굳는 경험을 했다. 장 씨는 13일 덕성여대에서 열린 ‘세월호 진상 규명 간담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대학생들에게 담담하게 고백했다.
김도연 씨(21·여)는 참사를 겪은 지 9개월 후부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몽롱한 상태로 지내던 어느 날,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해리(解離) 증상이다.
별다른 증상이 없었던 C 씨(21)는 지난해 말 직장에 들어갔다.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전교육 시간에 세월호 침몰 영상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모든 각오가 무너져 내렸다. 당직을 설 때 불을 끄면 컴컴한 물 속으로 뛰어들 때처럼 온몸이 떨렸다. 결국 C 씨는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생존자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퇴사 후 C 씨는 가끔 자신의 방에서 나와 어머니 옆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어깨만 두드려주며 속앓이를 했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서 C 씨의 어머니는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또 다른 세월호 생존자 D 씨(21·여)의 어머니는 “‘차라리 그때 죽은 게 나였다면…’이라는 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 “재난 트라우마에 ‘생애 전 주기’ 지원 필요”
보건복지부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이달 5일 국립정신건강센터 내에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설치했다. 투입된 예산은 17억 원, 상주 인력은 25명이다. 센터는 재난 발생 시 ‘안심버스’를 보내 1차 상담을 돕고 정신건강 전문인력의 배분과 교육을 총괄하게 된다.
하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인구 2472만 명인 호주는 2000년 ‘호주 외상 후 정신건강센터’를 세운 뒤 예산 47억 원, 인력 30명을 투입해 PTSD 치료 지원과 연구를 활발히 벌이고 있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발생 이듬해에 ‘세계무역센터 건강프로그램’을 만들고 정신건강 전문인력 145명을 투입해 생존자와 유가족을 장기 추적 관찰하고 있다. 뉴욕 시에서만 5만1674명이 이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세월호 생존자 치료를 총괄하는 고영훈 안산온마음센터장(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세월호 피해자뿐 아니라 재난을 겪는 이들이 장기간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생애 전 주기’ 트라우마 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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