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1시경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A아파트. 택배차량 한 대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췄다. 하지만 더 이상 들어갈 수없었다. 이곳은 택배차량 ‘출입 금지’ 아파트다. 지하주차장 진입도 어렵다. 택배차량 높이는 2.5m인데 주차장 입구가 2.3m이다. ‘택배 분쟁’이 발생한 경기 남양주시 다산신도시의 한 아파트와 판박이다.
이날 기자는 택배차량에 타고 직접 배송에 나섰다. 짐칸에서 상자 20여 개를 손수레로 옮겼다. 키 180㎝인 기자의 가슴까지 상자가 쌓였다. 단지 입구에서 손수레를 끌고 각 동으로 향했다. 가장 안쪽의 동까지 가는데 200m 가까이 걸어야 했다. 그렇게 택배차량과 각 동을 6차례 왕복한 뒤 배송이 끝났다.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함께 배송한 택배기사 송모 씨(29)는 “비나 눈이 올 때 생수와 쌀처럼 무거운 짐을 옮길 때는 말 그대로 끔찍하다”고 말했다.
● 입구 막히니 시간 1.5배 더 걸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시간 동안 택배차량을 타고 마곡지구 일대를 돌았다. 이곳은 다산신도시처럼 새로 지은 아파트가 많다. 일부 아파트는 지상의 차량 출입을 제한했다. 다산신도시 아파트처럼 단지 내 교통사고 발생 등 안전을 고려한 결정이다.
하지만 B아파트는 택배차량의 단지 내부 진입이 가능하다. 사실 B아파트도 택배차량 진입을 막았던 적이 있다. 지난해 택배차량이 과속으로 달리는 걸 본 한 주민이 관리사무소에 “택배차량 진입을 막아 달라”고 건의한 것이다.
손수레 배송이 시작되자 택배를 옮기는 시간이 1시간 이상 늘어났다. 이 아파트 배송을 맡고 있던 송 씨는 체력적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택배를 주문한 아파트 주민을 한 명씩 만날 때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불안해하는 주민에게 안전운행을 약속했다. 송 씨의 진정성은 통했다. 일주일도 안돼 입구 통제가 풀렸다. 그후 송 씨는 약속대로 아파트 단지에서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기어를 항상 1단에 놓고 늘 주변을 살피며 운전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는 A아파트에서 3시간 50분 동안 택배 150여 개를 배송했다. 1개당 90초가량 걸렸다. B아파트에서는 1시간 반 동안 90개 남짓 배송했다. 1개당 약 60초가 소요됐다. 단지 진입이 불가능한 A아파트의 배송시간이 약 1.5배 길었다.
● 소통과 이해로 해결할 수 있다
18일 다시 마곡지구를 찾았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주민, 택배기사를 만났다. 대부분 실버택배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노인복지를 위해 지역사회 구성원이 뜻을 모아 추진한 것이 아닌 탓이다. 아파트 주민과 택배기사 사이에 불신이 남은 상태에서 실버택배는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A아파트에서 만난 한 택배기사는 “실버택배 도입 후 만약 파손이나 분실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 측은 “택배가 분실될 때마다 폐쇄회로(CC)TV를 돌려봐야 하고 경찰까지 부르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실버택배를 도입하더라도 아파트 주민과 택배기사 사이에 신뢰가 필수라는 뜻이다. B아파트에 사는 권모 씨(42·여)는 “물론 택배차량이 다니지 않는 것보다 조금 불안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택배기사들도 특별히 주의해서 운전하기로 약속했고 엄마들도 아이들 안전에 신경을 더 쓰면서 많이 나아졌다. 그렇게 서로 배려하고 조심하는 게 맞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택배회사와 주민이 대화의 기회를 만드는 게 가장 먼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단지별 배송 매뉴얼을 만드는 등 상생방안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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