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저항의 상징’ 된 가이 포크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가상의 제3차 세계대전 후인 2040년 영국, 주인공 브이(V)는 사회를 완벽히 통제하는 정권에 저항하여 혁명을 꿈꿉니다.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6년)의 줄거리입니다. 브이를 따라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을 쓴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해커 그룹 ‘어나니머스(Anonymous)’의 로고이기도 합니다. 2011년 월가 시위에서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 등장하는 등 이후 수많은 시위에서 이 가면이 사용되면서 가이 포크스는 저항의 상징으로 통합니다.

가이 포크스(1570∼1606)는 1605년 11월 5일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시켜 왕과 대신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입니다. 당시 가이 포크스의 저항 대상은 영국 국교회를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했던 제임스 1세와 그 추종 세력이었습니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매년 11월 5일 ‘가이 포크스 데이’를 기념하여 영국 전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립니다. 당시 왕실에서는 왕의 무사함을 기뻐하는 의미에서 불꽃놀이를 했으나 훗날 많은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뜻으로 불꽃놀이를 벌였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의도와 달리 가이 포크스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니 역설적입니다.

저항권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 인식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사회계약론자인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시민정부론’(1690년)에서 정부가 인민의 신탁을 배반하고 자연권을 침해하게 된다면 인민은 저항하여 정부를 재구성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천부인권적 권리로서 저항권은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사상적 기반이 됐습니다.

오늘날 저항의 대상은 정부뿐만 아니라 일상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 가이 포크스 가면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한항공 직원들입니다. 그들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퇴진과 갑질 근절을 촉구했습니다. 민간 기업에서 직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는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인 조현아 전 부사장(조 회장의 장녀)의 ‘땅콩회항’ 사건은 재벌가 갑질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2014년 이륙을 준비하던 항공기 기내에서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난동을 부린 데 이어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한 사건입니다. 최근에는 ‘물벼락 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조 회장의 차녀)의 부하 직원 및 협력업체 직원에 대한 막말과 물컵을 집어던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 뒤 기업의 갑질 문화에 찌들었던 전현직 직원들의 고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이 갑질 대신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저항의 상징#가이 포크스#브이 포 벤데타#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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