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 두 달 전 개통한 자전거 전용차로 옆으로 차량들이 달리고 있었다. 신호등 옆에 ‘60’이라고 쓰인 제한최고속도 표지판이 있었다. 흥인지문과 세종대로 방향으로 각각 설치된 11개와 13개 표지판 모두 같은 숫자였다. 하지만 이 구간의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50㎞다. 표지판만 믿고 속도를 낸 운전자는 모두 ‘반칙운전’을 한 것이다.
● 정책 따로, 심의 따로…갈 길 먼 ‘안전속도’
올 3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심의위원회를 열고 종로의 세종대로 사거리부터 흥인지문 사거리까지 2.9㎞ 구간의 제한최고속도를 시속 60㎞에서 50㎞로 낮추기로 결정했다. 앞서 종로에는 지난해 12월 중앙버스전용차로가 개통하면서 보행자 통행이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4월 8일 자전거전용차로 개통과 함께 “종로의 최대 주행속도를 시속 50㎞로 하향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두 달 넘게 종로의 제한최고속도 안내 표지판은 여전히 시속 60㎞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쩔 수없이 실제 과속단속도 시속 60㎞ 기준으로 이뤄졌다.
이는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교통행정이 제각각 이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현재 각 도로의 제한최고속도는 물론 신호등과 표지판 등 시설물은 경찰이 관리한다. 지난해 종로의 제한최고속도 하향 방침을 세운 서울시는 올해 3월 9일 서울경찰청에 속도 조정 심의를 요청했다. 심의는 19일 후 통과됐다.
도로 시설물 설치와 관리는 서울시도시기반시설본부가 담당한다. 서울경찰청 결정에 따라 시속 50㎞로 바뀐 도로 시설물 설치가 곧바로 추진돼야 한다. 하지만 4월 24일에 시설물 변경 요청이 도시기반시설본부에 접수됐다. 행정절차가 늦어지면서 시속 60㎞로 속도를 내는 차량 사이로 보행자와 자전거가 다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 같은 상황은 3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겨우 이달 20일에야 시설물 교체 공사가 시작돼 현재 일부 표지판이 교체됐다. 전체 구간에 시속 50㎞ 속도제한 표지판 41개, 노면표시 18개가 새로 설치된다. 지난해 중앙버스전용차로 공사 때는 물론이고 올해 초 자전거전용차로 공사 때라도 동시에 진행했다면 운전자와 보행자 불편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설물 설치 및 교체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늦었다”라고 해명했다.
● “불편하다” 민원에 밀린 ‘5030’
성남대로는 경기 성남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5.7㎞ 길이의 도로다. 북쪽으로는 서울 송파대로, 남쪽으로는 경기 용인시의 용구대로와 이어진다. 왕복 10~12차로로 넓다. 도로를 따라 분당신도시와 모란시장 등이 이어진다. 차량만큼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도 많다.
문제는 성남대로의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80㎞라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올림픽대로 등 자동차 전용도로에서나 볼 수 있는 제한속도다. 전국적으로도 일반도로의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80㎞인 건 흔하지 않다.
이 속도로 달리는 차량에 보행자가 치이면 대부분 사망하거나 치명상을 입는다. 교통량이 적은 야간(오후 10시~오전 6시)은 더 위험하다. 도로교통공단 분석 결과 성남대로에 있는 지하철 분당선 모란역과 야탑역 주변에서는 2016년 한 해에만 30건 이상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야간에 보행자가 차량에 치이는 교통사고는 모란역과 야탑역 주변에서 각각 10건, 3건 있었다. 같은 해 성남 지역의 신호위반사고도 성남대로 구간인 모란역과 태평역 주변에 집중됐다. 사고의 대부분은 과속이 원인이었다.
지금도 성남대로는 늦은 오후만 되면 시속 100㎞를 오르내리는 과속차량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속도하향 추진은 지지부진하다. 성남대로의 제한최고속도는 성남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를 관할하는 경찰서 세 곳이 나눠서 관리한다. 최근 서울을 비롯해 도심 주요 도로의 제한최고속도를 시속 50㎞로 낮추는 추세이지만 성남대로에 대해선 그동안 아무 논의가 없었다. “차량 속도가 느리면 불편하다”는 지역 내 민원 탓이다.
정부의 강력한 방침에 따라 3개 경찰서는 뒤늦게 이달 말 속도하향 여부를 심의한다. 하지만 시속 70㎞로 하향하는 것이 목표다. 달랑 10㎞만 조정하는 이유도 민원이 이유다. 정부와 경찰청이 도심 일반도로 속도를 시속 50㎞로 낮추려는 움직임과 역행한다. 성남시는 소관업무가 아니라며 성남대로 속도하향 여부에 손을 놓고 있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안전속도 정책의 정착을 위한 관련 규정이 제대고 갖춰지지 않아 곳곳에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과 스웨덴처럼 안전속도에 대한 통합된 지침을 만들어 각 도로에 빠르게 적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차량제한속도 하향정책이 자리를 잡으려면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리나라처럼 교통안전정책을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나눠 맡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경찰과 지자체가 한 몸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일찍이 속도하향정책을 정착시킨 일본은 관련 행정절차를 개편했다.
일본은 2009년 제한최고속도 결정에 도시, 농어촌 같은 지역 특성뿐만 아니라 차로 수, 중앙분리대 설치 여부, 보행자 통행량, 주민과 지자체 의견을 반영했다. 예를 들어 도시 왕복 2차로 이하 도로는 보행자 통행량이 많으면 시속 40㎞, 적은 곳은 시속50㎞로 설정했다. 이 같은 변수들을 조합해 모두 12가지 제한속도 기준을 만들었다.
경찰이 제한최고속도를 비롯한 교통안전정책을 정하지만 도로 상황에 맞는 유연성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다.
도쿄(東京)역과 관공서, 대기업, 언론사 사옥 등이 밀집한 일본 도쿄 마루노우치(丸の內). 하루 유동인구만 수백만 명인 이곳 중심거리의 차량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40㎞다. 지역 경찰서가 안전한 보행을 위해 정했다. 특히 출퇴근시간인 오전 8~11시, 오후 5~6시는 중점시간대로 정해 특별관리하고 있다. 사람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된 마루노우치는 1년 내내 축제와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마루노우치와 환경여건이 비슷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는 상황이 다르다. 유동인구가 많은 한국거래소 앞 여의나루로(왕복 6차로)의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40㎞다. 벚꽃축제가 열리는 4월이면 인파로 가득한 국회 뒤 여의서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업무지구와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국제금융로와 여의대방로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60㎞다. 이들 도로에서 뻗어나가는 이면도로도 마찬가지다. 도로 상황을 감안한 별도 제한최고속도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전국 일반도로 제한최고속도를 시속 50㎞로 낮출 계획이다. 주거지역 이면도로 같은 생활도로는 시속 30㎞를 적용할 방침이다. 지난해 8월 출범한 ‘안전속도 5030 협의회’에서 연내 안전속도 정책 기준을 마련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찰과 지자체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지 못한다면 속도하향 정책이 오히려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에게 혼란만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지 않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역별 특성을 면밀히 살펴서 일관되고 신속하게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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