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리던 지난달 28일 오전 경남 하동군 하동읍 섬진강변의 하동문화예술회관. 강 건너 광양 매화마을 산허리에는 하얀 속치마 같은 안개구름이 걸려 있었다. 지리산 자락 구재봉과 분기봉에서는 상큼한 공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회관 1층 하동아트갤러리에 들어서자 한국 최고의 거벽(巨壁) 등반가인 박정헌 대장(47)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 끝으로 반가움이 가득 전해졌다. 자타가 인정하는 슈퍼 알피니스트의 표정과 눈빛은 편안하고 그윽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그레이트 히말라야’ 사진전을 열고 있다. ‘신의 뜻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전시회는 8일까지 열린다. 오랜 인연이 있는 윤상기 하동군수가 초대했다. 윤 군수는 “사진의 작품성, 주제가 있는 배치 등이 놀랍다”고 높게 평가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2011년 히말라야 2400km를 패러글라이딩으로 6개월 동안 횡단하면서 찍은 사진과 2014년 히말라야를 카약, 산악자전거, 스키와 패러글라이딩으로 이동하며 포착한 사진 50점을 선보인다. 각종 장비와 소품, 허영만 화백의 그림도 재미를 더한다.
하동군 문화관광실 최미리 큐레이터는 “박 대장이 작품 선정과 배치 대부분을 맡았다. 1300여 명이 다녀갔다”고 전했다. 방명록엔 ‘박정헌 괴물이다. 그리고 산이다’(캘리그래퍼 강봉준 씨), ‘8번 살아 돌아온 남자. 영원한 기록을 남기다’(독설닷컴 고재열 기자)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박 대장은 “히말라야 횡단의 위험한 여정 속에서도 무거운 렌즈교환식 카메라로 풍광과 그곳의 순수한 사람들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하동 사진전이 끝나면 수천 점의 사진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선별한 뒤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책도 출간하기로 했다.
그에겐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는 세계 대탐험. 노르웨이의 해안선을 카약으로 돌고 로키산맥과 만리장성을 글라이더로 찾아 사진과 영상에 담을 예정이다. 박 대장은 “영어 능통자 등 3, 4명으로 팀을 꾸려 자연문화유산과 문화유산의 ‘심장’으로 들어가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에 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가을쯤 육로로 북한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간 뒤 3년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고 마지막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요트로 귀국하는 일정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산악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테마와 함께 볼거리와 교육을 겸할 수 있는 종합 문화예술 공간을 구상 중이다. 그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주시 중안동 배영초등학교 옛 본관을 잘 손질할 수 있다면 훌륭한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성(城)을 활용해 더욱 유명해진 이탈리아 볼차노시의 ‘메스너 산악박물관(MMM)’을 예로 들었다. 고향인 사천시의 모충공원도 그의 박물관 후보지에 들어 있다.
박 대장은 요즘도 기업체 강연을 다니느라 바쁘다. 그는 “산은 준비된 자만을 허락한다”며 도전 정신과 변화를 강조한다. 사단법인 히말라얀 아트갤러리(HAG)를 이끌며 네팔 학교 건축, 셰르파 지원을 하고 있는 그는 “두 가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모든 정열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박정헌=1989년 초오유 동계 남동벽 등반, 1994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 2000년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 히말라야에 ‘코리안 하이웨이’ 개척. 2005년 후배 최강식과 촐라체 북벽을 등정하는 과정에서 손가락 여덟 개와 발가락 일부를 잃었다. 이후 패러글라이딩, 카약, 산악자전거로 산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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