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유엔평화기념관 2층에서 36주기 추모일 맞춰 12일 문열어
“장군의 희생정신 잊지말자”… 유품 전시-특별 다큐멘터리 상영
1953년 11월 27일. 피란민이 모여 살던 부산 중구 판자촌에서 오후 8시 20분경 시작된 불은 14시간 동안 꺼지지 않았다. 화마는 주택 3132채를 완전히 집어삼켰고 사상자 29명과 이재민 3만여 명을 낳았다. 부산역과 부산우체국도 사라졌다. 정부는 긴급 구호 활동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고, 서툴렀다. 6·25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불과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해 미군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리처드 위트컴 장군(1894∼1982·사진)은 전쟁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한국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군법을 어기고 급히 군수물자를 풀었다. 이재민을 위한 천막을 짓고 옷과 식료품을 나눠줬다. 미국 의회는 청문회를 열어 그의 이런 행동을 추궁했다. 하지만 위트컴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한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했다. 추궁하던 의원들도 감명을 받아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그는 더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부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은 장군의 36주기 추모일인 12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 기념관 2층에서 ‘위트컴 장군 상설전시실’을 개관했다. 그동안 위트컴 장군의 발자취는 1층 4D(4차원) 입체영상관에서 한시적인 특별기획전 형태로 소개됐다. 이번에 마련된 전시실에서는 장군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당시 착용했던 군복, 모자, 권총집 등을 볼 수 있다. 장군을 기리는 특별 다큐멘터리도 상영된다.
개관식에는 장군의 딸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 정권섭 위트컴추모사업회 회장, 전호환 부산대 총장, 박주홍 대구 5군수지원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장군의 36주기 추모식도 함께 열렸다. 유엔평화기념관 박종왕 관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헌신한 위트컴 장군의 발자취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하는 진정한 군인정신”이라고 말했다. 강석환 위트컴추모사업회 부회장은 “장군의 희생정신과 이타심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에게는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1954년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민간 차원의 한국 재건과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해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부인 한묘숙 여사와 1964년 결혼한 계기도 한 여사가 충남 천안 등지에서 보육원을 운영했고, 장군이 이를 후원한 게 인연이 됐다.
부산에 메리놀 병원을 짓기 위해 수녀들과 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모금 활동도 펼쳤다. 또 협소하고 목조건물이던 부산대를 신·증축하기 위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미8군사령관을 설득해 오늘날 부산대가 있는 금정구 장전동 일대 165만2892m²(약 50만 평)를 제공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5만 달러 상당의 건축자재를 지원했고, 미군 공병부대에서 진입로와 대지 조성 공사를 돕도록 했다.
1982년 타계한 그는 생전 유언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지난해 1월 향년 90세로 타계한 한 여사도 남편이 안장된 유엔기념공원에 함께 잠들었다. 상설전시 관람은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댓글 0